〈금동향로〉는 용주사 소장 향로 3점 중 1972년 경기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된 2점의 향로이다. 이 향로는 고대 중국 청동기인 방정(方鼎)을 방제한 것으로, 방형 몸체에 구연에 귀가 붙은 수직귀[立耳]와 납작한 편족(扁足)으로 구성되어 있다. 향로 바닥면 중앙에는 방형 틀 안에 전서(篆書)로 ‘魯公乍公文王尊彛(노공사공문왕준이)’라는 7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북송 휘종대에 편찬된 『선화박고도(宣和博古圖)』에 수록된 〈주문왕정(周文王鼎)〉의 내용과 같다. 『홍재전서(弘齋全書)』 「춘저록(春邸錄)」 중 〈태호석기(太湖石記)〉에 정조가 소장한 문왕정에 대한 기록이 있어, 정조가 즉위 후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능침사찰에 하사한 것을 알 수 있다.
용주사 소장 〈금동향로〉는 고대 중국 청동기인 방정을 방제한 것이다. 향로의 다리는 기(夔)를 형상화한 편족인데, 따로 주조한 후 리벳으로 몸체와 연결하였고, 다리의 상부는 도금을 하였다. 방형 몸체는 4개의 판을 별도 주조 후 땜으로 접합하였고, 몸체 양끝의 비릉과 바닥판도 별도 주조 후 땜으로 접합하였다. 구연의 측면에는 뇌문(雷文)이 새겨져 있다. 귀는 구연 위에 붙은 수직귀로 마름모꼴 뇌문이 새겨져 있으며, 역시 별도 주조 후 리벳으로 고정하였다. 뚜껑 측면에는 덩굴문양이 새겨져 있고, 여백은 어자문(魚子文)으로 메웠다. 뚜껑 정상의 투조 연기구멍판은 별도 주조 후 땜으로 접합하였으며, 연기구멍판 중앙의 손잡이는 리벳으로 연결하였다.
향로 몸체에 새겨진 문양은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몸체의 상단과 하단에는 각기 다른 문양을 시문하였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문양의 구조로서 상단과 하단 모두 보조문양으로 뇌문을 사용하였고, 보조문양에서 주문양을 돌출시키고 있다. 상단의 주문양은 두 마리의 용이 교차하는 문양을 좌우 3구씩 대칭으로 표현하였고, 하단의 주문양은 도철을 대칭으로 표현하였다. 또한 상단과 하단의 주문양은 도금을 하여 문양을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보조문양에서 주문양을 돌출시키는 구조는 상대 후기 고동기의 문양 표현 방법으로 이층화(二層花)라 하며, 북송대 이후 청대까지 제작된 방고동기에서도 지속적으로 쓰였다.
향로 바닥면 중앙의 방형 문양틀 안에 전서로 새긴 7자 명문은 향로의 명칭과 성격을 알려주는 중요 근거가 된다. ‘노공사공문왕준이’라는 7자 명문은 북송 휘종대에 편찬된 『선화박고도』에 수록된 〈주문왕정(周文王鼎)〉의 명문과 같다. 여기서 노공은 주공(周公)을, 문왕은 주나라의 문왕(文王)을 말하며, 준이(尊彛)는 제기(祭器)라는 뜻이다. 『선화박고도』에는 주공이 아버지인 문왕을 제사 지내기 위해 〈주문왕정〉을 만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용주사 소장 〈금동향로〉는 『선화박고도』의 〈주문왕정〉을 방제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홍재전서』 「춘저록」 중 〈태호석기〉에는 정조가 갑오년 봄에 태호석을 구해 창문 앞에 약관(藥罐) · 향구(香甌) · 문왕정(文王鼎) · 선덕로(宣德爐)를 배열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정조는 오랫동안 태호석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1774년 고원(古苑)으로부터 태호석을 구해 창문 앞에 문왕정, 선덕로 등과 함께 놓았다고 한다. 정조가 태호석을 구한 시점이 갑오년인 1774년이므로 문왕정과 선덕로를 구한 것은 그 이전임을 알 수 있다. 이 기록을 통해 정조는 세자 시절인 1774년 이전부터 고동 수집과 감상의 취미가 있었고, 문왕정과 선덕로는 정조의 고동 수집과 감상의 대상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문왕정은 조선 후기인 18세기 중반에 이미 조선에 유입되어 있었는데, 이윤영의 『단릉유고(丹陵遺稿)』 권9에는 1749년 이윤영이 오찬(吳瓚, 1717~1751)의 서재인 산천재(山天齋)에서 문왕정을 보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 외에 『담헌서(湛軒書)』와 『열하일기(熱河日記)』에도 문왕정에 대한 기록이 있어 18세기 중반 이후에는 문왕정에 대한 인식과 함께 수집과 감상이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정조가 세자 시절부터 소유하던 문왕정을 용주사에 하사한 것은 용주사가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현륭원을 보호하는 원찰이었기 때문이고, 더불어 주문왕정은 주공이 아버지 문왕의 제사를 위해 만든 것인 만큼, 정조가 사도세자의 능침사찰인 용주사에 문왕정을 하사한 것은 유교적인 명분에도 부합하였을 것이다.
용주사 소장 〈금동향로〉는 편족과 방형 몸체, 수직귀라는 형태적 특징과 명문은 그대로 따르고 있지만, 몸체 상단의 문양을 기가 아닌 용으로 표현한 점 등은 『선화박고도』의 〈주문왕정〉을 충실히 따른 명대의 것과는 달리 부분적인 변화를 시도한 청대의 주문왕정 계통으로 판단된다.
정조의 세자 시절 고동 수집과 감상에 대해 알 수 있는 유물일 뿐만 아니라 주문왕정의 명문이 주공이 아버지 문왕의 제사를 위해 만든 것인 만큼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능침사찰인 용주사에 문왕정을 하사한 것은 유교적 명분에도 부합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