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족과 양이가 달린 정의 기형적 특징은 『설문해자(說文解字)』에도 잘 명시되어 있다(鼎三足兩耳). 고대 중국의 문헌과 사서에 따르면, 삼황오제(三皇五帝)시대에 정이 출현하였고, 하(夏)나라 우왕(禹王)이 천하를 다스리는 상징적 기물로 구정(九鼎)을 만들었다고 한다. 즉 고대 중국에서 정은 권력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상징물이었고, 덕이 있는 왕조만 소유할 수 있다고 여겨졌다.
중국에서 정이 본격적으로 제작된 시기는 상대이며, 형태에 따라 원형 정과 방형 정으로 나뉜다. 원형 정은 가장 많이 제작된 형태로, 다리가 첨족(尖足)에서 기둥형[柱足], 말굽형[蹄足]으로 변하였다. 방형 정은 상대 중기부터 나타나며, 다리는 기둥형에서 말굽형으로 변하였다. 상대 정에 표현된 문양은 초기에는 띠를 이루며 도철문(饕餮文)이 표현되었다. 그러나 상대 후기에 들어 뇌문(雷文)을 보조문양으로, 도철을 주문양으로 사용하고, 보조문양에서 주문양을 돌출시켜 표현하는 이층화(二層花)의 구조로 변하였다. 주대(周代)의 정은 상대 후기의 정을 계승하였지만, 문양은 점차 축소되고 명문(銘文)이 많아지는 경향을 보이며, 대표적 문양인 도철도 점차 사라진다. 중국 고대 왕조인 상대‧주대에 활발하게 제작되던 정은 진한(秦漢) 시대를 거치면서 점차 사라졌다.
이후 북송은 국초부터 예제(禮制) 개혁을 위해 하‧상‧주 삼대의 고동기를 수집하여 연구하였고, 고동기 방제를 통한 예제 개혁을 목표로 하였다. 특히 휘종(재위 1100~1125)은 삼대의 고동기를 수집하여 재현하였고, 선화 연간에 수집한 고동기를 바탕으로 839건의 도상과 명문, 크기와 출토지, 소장자의 이름을 기록한 『선화박고도(宣和博古圖)』를 만들었다. 북송 이후 중국에서는 정을 권력의 상징물 대신 사대부의 명창정궤(明窓淨几)를 위해 향로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청동정은 한사군(漢四郡)이 있었던 낙랑(樂浪) 지역, 경상남도 울산과 김해 등지의 원삼국시대 유적, 삼국시대 고구려와 신라의 고분을 중심으로 발견되었다. 낙랑군이 위치한 평안도 일대의 정백동(貞栢洞) 8호분, 석암리(石巖里) 9호분 등에서 말굽형, 목 상단에 붙은 귀, 몸체 중앙에는 돌대(突帶)가 둘러진 형태의 정이 출토되었다. 원삼국시대의 유적인 울산 하대리와 김해 양동리에서도 정이 출토되었다. 하대리 23호분 출토 정은 49.8㎝의 대형으로 한반도 출토 정 중에서 가장 크며, 양동리 322호분 출토 정은 몸체에 명문이 새겨져 있어 중국에서 수입한 것으로 판단된다. 두 유적에서 출토된 정은 권력의 상징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시대의 정은 고구려와 신라에서만 발견된다. 고구려에서는 평양 천도 이전 수도이던 지안(集安) 일대 칠성산(七星山)과 우산리(禹山里) 등에서 발견되었다. 칠성산 96호분 출토 정과 우산리 68호분 출토 정은 말굽형 다리와 고리가 달린 뚜껑이 특징이다.
신라의 정은 경주의 황남대총과 천마총 등에서 출토되었다. 황남대총에서는 북분에서 3개, 남분에서 2개의 정이 출토되었다. 북분 출토품은 말굽형 다리에 고리형 귀가 달려 있고, 남분 출토품의 형태도 유사하다. 천마총 출토품도 말굽형 다리에 고리형 귀가 달려 있고, 고구려의 칠성산, 우산리 출토품과 유사하여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와 신라 고분 출토 정들 역시 권력의 상징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조의 정 관련 기록은 권력 상징물로서의 성격을 보여 준다.
정은 통일신라시대에는 제작되지 않다가 고려시대에 들어 북송의 영향을 받아 다시 제작되었다. 고려에서도 북송에서와 같이 정을 향로로 사용하였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청자도철문방정(靑瓷饕餮文方鼎)〉은 『선화박고도』의 〈상소부정(商召夫鼎)〉을 그대로 방제한 것으로, 크기와 명문의 내용까지 동일하며, 향로로 사용한 것이다. 고려시대의 정은 방제의 단계를 지나 점차 고려화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정이 왕실용 제기와 향로로 사용되었다. 조선은 국초부터 『세종실록』 「오례(五禮)」, 『국조오례의』 등의 예서를 편찬하고 이것을 바탕으로 제기를 제작하여 사용하였다. 『세종실록』 〈제기도설(祭器圖說)〉에는 우정(牛鼎), 양정(羊鼎), 돈정(豚鼎)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들 정은 삼족과 양이의 기형적 특징은 유지하고 있지만, 몸체는 원통형이어서 전형적인 정과는 차이를 보인다. 반면 같은 『세종실록』 「오례」 흉례서례(凶禮序例) 명기(明器)조에 기록된 향로는 전형적인 정의 모습이어서, 제기용 정과 정형(鼎形) 향로는 기형의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에는 왕실의 길례인 종묘 의례와 사직단 의례 등에 정형 향로를 사용하였고, 이들 정형 향로는 의궤를 바탕으로 제작한 것이 특징이다. 한편 1887년 경복궁과 1902년 덕수궁 중건 시에는 근정전과 중화전에 고정식 정을 설치하였는데, 궁궐 정전의 정은 왕실의 권력을 상징하는 상징물이자 왕실 길례에서 향로로 사용하였다.
왕실과 사대부들을 중심으로 사용하던 정형 향로는 17세기 말부터 사찰에서도 사용되었다. 사찰의 정형 향로는 왕실의 하사품이거나 사찰에서 직접 제작한 것이다. 조선 후기 왕실의 원찰이던 유점사와 용주사 등에는 중국에서 수입한 정형 향로를 하사하였다. 반면 해인사 소장 〈청동은입사정형향로(靑銅銀入絲鼎形香爐)〉와 직지사 소장 〈철제은입사정형향로(鐵製銀入絲鼎形香爐)〉는 사찰에서 제작한 것이다. 왕실에서 하사한 정형 향로는 중국 고동기의 문양을 따르고 있지만, 사찰에서 제작한 정형 향로는 불교적 문양이 은입사로 표현된 것이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