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감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 경상도 도사 등의 관직을 역임한 문신.
이칭
중허(仲虛)
석곡(石谷), 입택(笠澤)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66년(명종 21)
사망 연도
1641년(인조 19)
본관
금산(錦山)
출생지
전라남도 곡성
주요 저서
입택집
주요 작품
조전일기
주요 관직
양남 제독|경상도 도사|김해부사
내용 요약

김감은 경상도 도사, 양남 제독, 김해부사 등을 역임한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선조대에 사마시에 입격하고, 광해군대에 문과에 급제한 이후 경상도 도사 등의 외직을 역임하였고, 광해군 재위 후반 낙향하였다가 인조대 후반에 다시 정계에 진출하였다.

정의
조선 후기 경상도 도사 등의 관직을 역임한 문신.
가계 및 인적 사항

김감의 본관은 금산(錦山), 자는 중허(仲虚), 호는 석곡(石谷) 또는 입택(笠澤)이다. 지금주사(知錦州事) 김신(金供)의 후손이다. 아버지 김성원(金聲遠)과 어머니 해주오씨(海州吳氏) 사이에서 1566년 11월 2일 전라남도 곡성 오지리에서 출생하였다.

주요 활동

어려서부터 경전을 통독하고 역사책을 두루 읽었다. 1588년(선조 22) 주1에 입격하였고, 1612년(광해군 5) 주2주3로 급제하였다. 1617년(광해군 9) 주4주5으로 연경(燕京)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평안도 어사를 거쳐 경상도 도사를 역임하였다. 1620년(광해군 12) 양남(兩南) 제독(提督)을 지낸 뒤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단념하고 귀향하여 반구정(伴鶴亭)을 짓고 자연과 벗하며 지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발발하여 국왕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자 옥과현감(玉果縣監) 이흥발(李興淳) 등과 의병 500여 명을 모집하여 대제학 정홍명(鄭弘溟)의 휘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다음 해 인조가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대부분의 군사들이 흩어졌으나 그는 돌아가지 않고 한양으로 갔다. 국왕이 삼전도(三田渡)에서 항복의 의례를 행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638년 주6에 임명되었지만 부임하지 않았고, 1644년(인조 22)에는 김해부사를 역임하였다. 문장으로 명망을 얻었다. 1641년 5월 25일 전라남도 곡성군 죽곡면(竹谷面) 서정자리(西亭子里)에서 7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1902년(광무 6) 후손 김상수(金祥銖) 등이 김감의 유문을 여러 서적에서 수습 · 정리하고, 김영한(金甯漢)과 조원승(曺元承) 등에게 서문을 받아 문집 『입택집(笠澤集)』을 간행하였다. 『입택집』에는 김감이 1617년 성절사의 서장관으로 연경에 다녀올 때의 일들을 기록한 「조천일기(朝天日記)」가 수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원전

『입택집(笠澤集)』

인터넷 자료

호남기록문화유산 호남한문문집 검색: 입택집(http://www.memoryhonam.co.kr/sub02/sub02_detail.php?seq=466)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규장각 원문검색서비스: 입택집(https://kyudb.snu.ac.kr/book/view.do)
주석
주1

생원과 진사를 뽑던 과거. 초시와 복시가 있었다.    우리말샘

주2

조선 시대에, 임금이 성균관의 문묘에 참배한 뒤 보이던 문과.    우리말샘

주3

조선 시대에, 과거 합격자를 성적에 따라 나누던 세 등급 가운데 셋째 등급. 문과(文科)에서는 23명, 무과(武科)에서는 20명을 뽑아 정구품의 품계를 주었으며, 성균관ㆍ승문원ㆍ교서관의 임시직인 권지(權知)에 임명하였다.    우리말샘

주4

조선 시대에, 중국 황제나 황후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하여 보내던 사절.    우리말샘

주5

외국에 보내는 사신 가운데 기록을 맡아보던 임시 벼슬. 임진왜란 후에 종사관으로 고쳤다. 정사(正使)ㆍ부사(副使)와 함께 삼사(三使)로 불리며, 직위는 낮지만 행대 어사를 겸하였다.    우리말샘

주6

조선 시대에, 집현전, 홍문관, 교서관, 승문원 따위에 속하여 문한(文翰)의 일을 맡아보던 문관 벼슬. 정오품 또는 종오품이었다.    우리말샘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