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개물(金開物)의 본관은 의성(義城)이며 초명은 서정(瑞廷), 자는 원구(元龜)이다. 아버지는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낸 김훤(金晅)이다. 김개물은 과거에 여러 차례 낙방하였으나 춘궁시독(春宮侍讀)으로 충선왕을 호종하였던 아버지 김훤(金晅)의 덕으로 충선왕대에 감찰사(監察史)로 발탁되어 관직에 진출하였다. 전부시승(典符寺丞)으로 있을 때, 내부령 강융(姜融)의 청탁을 거절하였다가 그의 참소로 송가도(松加島)에 유배되었다. 후에 합주(陜州)의 수령으로 제수하였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아 다시 자연도(紫燕島)로 유배되었다. 유배에서 풀려난 뒤 15년 동안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유유자적하면서 한거하였다. 1325년(충숙왕 12) 서정을 쇄신하려는 충숙왕에 의해 다시 사헌지평(司憲持平)에 등용되었다가 장세(張世)의 말 탈취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충숙왕의 총신(寵臣) 왕삼석(王三錫)은 장세의 매부이기에 김개물을 때리고 마음대로 장세를 풀어주었다. 이러자 김개물과 헌사의 관리들이 대궐에 나아가 왕에게 장세에게 죄를 줄 것을 건의하였다. 하지만 충숙왕이 왕삼석의 편을 들자 사직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그의 부당한 사직을 애석하게 생각하였다.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김개물은 성품이 강직했으며 어려운 일이 있어도 태연하게 대처하였다고 한다. 또한, 시(詩)·서(書)·화(畫)에 모두 일가를 이루었다. 손님을 맞이할 때 술자리를 마련해 거문고를 타고 시를 지으며 즐겁게 대했으며, 대간을 지낼 때는 쟁신(諍臣)의 기풍이 있었다고 전한다. 김개물의 아들로는 과거에 급제한 김섬(金銛)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