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입지(立之). 아버지는 김부식(金富軾)이다.
1144년(인종 22) 문과에 급제, 내시직에 임명되었다. 당시 지공거(知貢擧) 한유충(韓惟忠) 등이 처음에 2등을 주었는데, 왕이 아버지 김부식을 위로하려고 1등으로 올리고 내시(內侍)에 속하게 하였다. 견룡대정(牽龍隊正) 정중부(鄭仲夫)의 수염을 촛불로 태우자, 정중부가 김돈중을 때렸다. 그러자 김부식이 정중부를 처벌하고자 하여, 정중부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의종 때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가 되었으나 환관 정함(鄭函)을 합문지후(閤門祗候)에 임명하는 것을 반대하여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郎)으로 좌천되었다가 시랑에 옮겨졌다.
그 뒤 김부식이 세운 관란사(觀瀾寺)를 중수하여 아우인 김돈시(金敦時)와 함께 왕의 복을 비는 절로 삼음으로써 의종의 환심을 샀다.
1167년(의종 21) 좌승선(左承宣)이 되었는데, 의종이 봉은사(奉恩寺)에서 연등행사를 마치고 환궁할 때 김돈중의 말이 놀라 한 군사의 화살통에 부딪쳐 화살이 의종의 수레에 떨어진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유시사건(流矢事件)으로 군인들이 죄없이 귀양가게 되어 김돈중에게 더욱 원한을 품게 되었다.
1170년 정중부가 보현원(普賢院)에서 난을 일으켜 많은 문신들이 살해당하자, 도망하여 감악산(紺嶽山)에 숨었으나 종자(從者)의 밀고로 잡혀 살해되었다. 김돈중은 죽으면서 유시의 화에 죄없는 사람이 많이 걸렸으니, 지금 나의 죽음은 마땅한 것이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