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경주(慶州). 아버지는 계림군(鷄林君) 김균(金稛)이다.
개국공신의 아들로서 음보(蔭補)로 관직에 올라 1408년(태종 8) 장령이 되었다.
그러나 무고 죄인(誣告罪人)의 처형에 풍헌관(風憲官)으로서 책임을 지고, 집의 탁신(卓愼), 지평 이소축(李小畜)과 함께 파직당해 보주(甫州)에 유배되었다. 1420년(세종 2)에 다시 기용되어 집의가 되고, 1423년 우부대언, 이듬해 우대언이 되었다. 이어 1425년에는 우대언(右代言)이 되었고, 이듬해 호조참판 등을 거쳐, 1427년 호조참판 등을 거쳐 대사헌이 되었다.
그 해 흉년이 들어 재해가 혹심하자 구황책(救荒策)을 올려, 농사에 피해를 입은 각 고을의 조세를 감면할 것, 각 도에 조관(朝官)을 파견해 농민의 고통을 위로할 것, 풍년이 들 때까지 중앙과 지방의 영선(營繕)을 금할 것, 변방 방어에 특별히 공이 많은 자를 등용할 것 등을 건의하였다.
1428년 형조참판으로서 분용미(分用米)를 추징하지 않은 책임으로 회인(懷仁)에 유배되었다. 그 후 곧 풀려나 경창부윤(慶昌府尹), 중군동지총제(中軍同知摠制)를 거쳐 1429년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이조참판·함길도도관찰사를 거쳐, 1433년 중추원부사가 되고 그 해 사은사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와 공조좌참판을 역임하고 황해도관찰사로 나갔다.
이듬해 인수부윤(仁壽府尹)을 거쳐, 1435년에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 그 뒤 1437년에 호조참판이 되고, 이듬해 이조참판 등을 거쳐, 1439년에는 형조판서에 올랐다. 이어 호조판서와 지중추원사 등을 역임하였다. 성품이 단의(端懿: 단아하면서도 의연함)하고 일을 빈틈없이 처리하였다. 시호는 희경(僖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