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등은 급벌찬(級伐飡)이었다. 734년(성덕왕 33) 12월에 쓰쿠시(筑紫)의 대재부(大宰府)에 도착하여 735년 2월에 일본의 도읍에 입경하였다.
이때 일본조정은 중납언(中納言) 정3위(正三位) 다치비진인현수(多治比眞人縣守)를 병부(兵部)에 보내어 신라사신의 방문 이유를 물었으며, 신라국이 국호를 고쳐 ‘왕성국(王城國)’이라고 하였다는 이유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현존하는 우리측 사료에는 이러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추측하건대 사신을 받아들이지 않은 진정한 이유는 일본이 발해와 국교를 맺은 데 있었던 듯 하다. 이처럼 일본이 8세기 중엽을 전후하여 신라 대신 발해를 선진문물의 통로로 삼게 되면서 신라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