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어서부터 독실한 행검(行檢)이 있어 중봉(重峯) 조헌(趙憲)이 김성원을 사랑하여 학문을 가르치면서, “너는 지극한 성품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명현(名賢)의 후손이니 더욱 힘써 하라.”고 하자, 그는 성심껏 선생을 복종하여 섬겼다. 1592년 임진왜란을 당하여 조헌이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자, 그는 용기 분발하여 선생을 따라 금산전투에 참가하였다.
이때 그의 부모가 연로하므로 가속(家屬)들이 참전을 말렸지만, 군부(君父)가 몽진(蒙塵)하였는데도 어찌 나 개인의 일만 돌아볼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출전하였다. 8월 18일 금산군의 서쪽 경계에서 적과 하루 종일 싸워 적이 거의 패배할 단계에까지 이르렀지만, 아군의 후원세력이 없어 조헌과 함께 28세로 전사하였다. 그와 함께 전투에 나갔던 종 몽해(夢亥)가 시신 더미에 숨어 있다가 살아나와서 전하기를, 우리 주인은 전장터에서도 조헌께서 항상 곁에 두고 크고 작은 일을 자문하였으며, 의(義)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고 하였다.
1595년(선조 28) 금산의 전적지에 윤근수(尹根壽)가 지은 비에 김성원의 이름을 새겼다. 김성원이 죽었을 때 나이 28세였는데, 적이 퇴각한 후 문생(門生)들이 시체를 수습하여 만든 칠백의총(七百義塚) 가운데에 함께 묻혔다. 1634년(인조 12)에 건립되고, 1663년(현종 4)에 종용(從容)으로 사액(賜額)된 종용당에 배향되었다. 뒷날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으며, 정문(旌門)이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