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응선(應善)이다. 문충공(文忠公) 권근(權近)의 6세손이다.
음보(蔭補)로 기용되어 관직이 상주판관에 이르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 조정으로부터 중로(中路, 혹은 2로)에서 일본군을 막도록 임무를 부여받은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이 4월 23일 상주에 도착하였다. 4월 18일 일본군이 고령(高靈)에 이르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상주목사(尙州牧使) 김해(金澥)는 군관(軍官)들을 데리고 순변사의 행차를 맞이한다는 핑계로 도망해 버리고, 판관 권길만이 상주성을 지키고 있었다. 이때 도착한 순변사 이일은 권길에게 군사가 없음을 꾸짖고 군사를 모으게 하였는데, 그는 상주 인근을 수색하여 700여 명의 군사를 모집하였다.
4월 24일 일본군이 상주에서 20리 떨어진 장천(長川)에 주둔하였으나, 이일의 군대는 척후병(斥候兵)이 없어서 이를 알지 못하였다. 25일 상주의 북천에서 모집된 농민 중심의 군사를 모아서 군사 훈련을 하고 있는데, 일본군 1군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부대가 급습하였다. 적이 사방을 에워싸고서 조총(鳥銃)으로 공격하자, 사장(沙場)에서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패배하였다.
이에 앞서 이일이 상주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일 때 죽음을 무릅쓰고 나라를 지킬 것을 맹세하자, 호장(戶長) 박걸(朴傑)을 비롯하여 많은 군사와 백성들이 호응하였다. 그러나 무기와 군사수의 열세로 패색이 짙어지자, 이일은 탈출하여 충주로 도주하였다. 이때 상주판관 권길, 호장(戶長) 박걸(朴傑), 종사관(從事官) 이경류(李慶流) 등은 함께 싸우다가 모두 순절하였다. 권길이 의관(衣冠)을 바로 하고 죽자, 박걸도 우리 제후(諸侯)가 나라를 저버리지 않았는데, 내가 제후를 버릴 수 있겠는가 하고 따라 죽었다고 전한다.
뒤에 좌승지(左承旨)에 증직되었다. 1602년(선조 35) 충청북도 음성군에 충신문(忠臣門)으로 정려(旌閭) 받았다. 1675년(숙종 1) 상주 북천의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었으며, 충신의사단(忠臣義士壇)에 모셔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