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해평(海平). 호는 송정(松亭).
고려 말 과거에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대사간·직제학·개성윤(開城尹)에 이르고,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이 침입했을 때 이를 토벌한 공이 있어 해평군(海平君)에 봉하여졌다. 1363년(공민왕 12) 홍건적으로부터 거란을 수복한 공로로 당시 전 성균사예로서 2등 공신에 책봉되었다.
조선에서는 예조판서에 이르렀다. 일선(一善: 지금의 경상북도 善山)에 있을 때는 매월 초하루에 학생들을 모아 학문을 강론하였고, 성산(星山)으로 이사하여서는 이숭인(李崇仁)과 도의(道義)로써 사귀어, 녹봉서당(鹿峯書堂)을 짓고, 백록동(白鹿洞)의 규약에 의거하여 밤낮으로 학문을 연마하였다.
또, 천곡(川谷)에 정사를 지어 정자(程子)와 주자(朱子)를 제향하였는데, 녹봉의 천곡에 있는 여러 서원들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