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명은 김을보(金乙寶). 본관은 순천(順天). 한발(旱魃)이 심해 그에게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게 하니 마침 많은 비가 왔다. 이 일로 특별히 이름을 김승주로 고쳤다고 한다. 아버지는 정주목사(定州牧使) 김유정(金惟精)이다.
1380년(우왕 6) 흥위위별장(興威衛別將)로 관직에 들어선 뒤 군기시소윤(軍器寺少尹)을 거쳐, 1389년(창왕 1) 풍주수령으로 임명되었다. 그 때 풍주 연해를 노략질하던 왜구를 무찌르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조선이 건국되자 1393년(태조 2)에 전중경(殿中卿)에 오르고, 이어서 이성만호(泥城萬戶)가 되었다. 1394년에 의흥삼군부첨절제사(義興三軍府僉節制使)가 되었다가 그 해 형조전서로 전임하였다. 1396년 동북면청해도안무겸찰리사(東北面靑海道安撫兼察理使)로 나가 야인 진압에 공을 세웠고, 호조전서·이조전서·중추원부사·경상도병마절제사·경상도병마도절제사를 지냈다.
1400년(정종 2)에 좌군총제로 제2차 왕자의 난을 평정하고 태종이 왕위에 오르는 데 협력한 공으로, 1401년(태종 1) 익대좌명공신(翊戴佐命功臣) 4등에 책록되고 여산군(麗山君)에 봉해졌다. 태종 초에 강계만호에 이어 공조판서·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를 지냈다. 1406년에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07년에 동북면병마도절제사 겸 영흥부윤·도순문찰리사 등을 지냈다. 1410년(태종 10)에 야인이 경원(慶源)에 침입하자 왕명을 받고 나가 이를 격퇴하였다. 이듬해 참찬의정부사에 이어 1413년 서북면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 겸 평양부윤(兼平壤府尹)을 지냈다.
1414년 병조판서로 있다가 이듬해인 1415년에 평양군(平陽君)으로 개봉되었으며, 판중군도총제(判中軍都摠制)가 되었다. 그 뒤 평양부원군에 진봉되었다. 시호는 양경(襄景)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