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광산(光山). 함경남도 원산 출생. 호는 노담(老潭). 광복 전 일본 도쿄의 다이헤이요미술학교(太平洋美術學校)에서 수학했다.
1946년 이후 서울에 정착하여 현대 미술을 지향하는 한편,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의 보수주의를 비판하는 등의 미술평론 활동도 했다. 작품으로는 피카소의 영향이 짙은 상징적 인물상의 현대적 화면 창조를 추구했다.
1957년에는 김병기(金秉騏) 등과 조선일보사가 주관한 현대작가초대전 조직을 주도했다. 그 시기의 작품은 「검은 태양」 연작으로 인간, 가족, 여신(女神), 화조(火鳥), 골고다의 언덕 등 현대인의 자아 상실 상황을 상징적으로 표상하였다.
1960년대 중반에는 빨강, 노랑 등의 강렬한 원색조로 직선적이고 즉흥적인 평필(平筆) 작업의 구조적 추상 회화를 수년간 시도하다가 그 전의 인간 시리즈로 돌아가 내면적 형상을 한층 복합적으로 전개시켰다.
1970년대 이후의 작업에는 선명한 다색(多色) 선들의 즉흥적이고 기호적(記號的)인 표상과 ‘현대 풍경’ 또는 ‘잃었다는 그 숱한 이야기’ 등의 모호한 문구(文句)가 느닷없이 낙서처럼 도입되기도 하였다. 즉, 이 작업들은 독자적 화면 창조를 현대적으로 일관되게 지향했던 김영주의 특이한 표현 심리를 반영한 것이었다.
1980년대 중반 이후에는 비사실적인 인간 형상의 구상적(具象的) 표현과 전보다 더욱 빠르고 즉흥적인 속도감으로 이루어진 낙서 같은 형상을, 찬란한 색상과 새롭게 융합시키려고 하였다.
그래서 이때 발표된 「신화시대」 연작도 종래의 중심 주제인 ‘현대인의 삶과 상황’을 자유로운 회화적 작위(作爲)로 연출한 것이었다. 그러면서 화면마다의 표현 감정과 상상을 ‘대화’, ‘그 얼굴’, ‘춤’, ‘그날이 오면’, ‘너와 나’, ‘꿈’ 등의 부제로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현대 작가들의 형식적 연작이 대개 자기 모방을 나타내듯이 김영주 역시 말년 작품들은 방법적 반복 형태로 이어졌다. 그렇더라도 1950년대 이후의 한국 현대 미술 전개 과정에서 김영주의 작품 태도와 정신 및 전향적 평론 활동 등의 업적은 매우 뚜렷하다.
1990년에 예술문화대상을, 1992년에 은관문화훈장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