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옹 ()

고대사
인물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이찬으로 시중, 상상, 병부령 등을 지낸 관리.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미상
주요 관직
시중(侍中)
내용 요약

김옹은 신라 진골 출신의 고위 관료로서, 중대 말기에 활약하였다. 경덕왕 때 집사성의 장관인 시중이 되어 정치와 행정의 핵심 역할을 맡았고, 혜공왕 때는 대각간에 올라 최고의 집정자로서 정국을 주도하였다. 외교 면에서는 일본과 우호적인 교류를 추진하였다.

정의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이찬으로 시중, 상상, 병부령 등을 지낸 관리.
가계 및 인적 사항

김옹(金邕)은 신라 진골 출신의 고위 관료이다. 가계에 관해서는 분명한 기록이 없으나, 『속일본기(續日本紀)』에 김옹이 김순정(金順貞)의 손자라고 나온다. 김순정은 경덕왕의 장인이었으므로 김옹은 경덕왕대 유력한 진골 가문 출신이었다고 볼 수 있다. 「성덕대왕신종명(聖德大王神鐘銘)」에는 혜공왕이 원구(元舅)에게 의지하였다고 전한다. 여기 나오는 원구가 김옹인데, 원구는 외숙을 가리키므로 김옹이 혜공왕의 외숙이자 경덕왕의 처남이라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원구를 장인으로 해석하여 혜공왕의 장인인 이찬 유성(維誠)을 가리킨다고 보기도 하여 왕실과의 혼인 관계는 분명하지 않다.

주요 활동

김옹은 경덕왕 19년(760) 집사성의 장관인 시중(侍中)이 되어 중앙 행정의 핵심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이에 이르기까지의 초기 행적은 자료에 보이지 않는다. 경덕왕 22년(763)에 김옹은 상대등 신충(信忠)과 함께 시중직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혜공왕 7년(771) 성덕대왕신종을 만들 때 그의 관직과 관등이 “검교사(檢校使) 병부령 겸 상상(上相) 대각간(大角干)”이었다고 하므로, 김옹은 혜공왕대 들어서도 정국의 중심에 있었다. 『속일본기』의 774년 기사에도 그는 신라 조정의 집정자(執政者)라고 기록되었다.

평가

김옹의 정치적 입지에 대해서 전제왕권에 반대했다고 보거나, 정반대로 친왕권적인 인물이라는 이해가 제기된 바 있다. 한편, 일본 측이 김옹을 우호적으로 인식한 것은 그가 대일 외교를 중시했기 때문이고, 그전에 친당 외교를 추진한 귀족 세력과 대립하였다고 이해하기도 한다.

참고문헌

원전

『삼국사기』
「성덕대왕신종명(聖德大王神鐘銘)」
『속일본기(續日本紀)』

단행본

이영호, 『신라 중대의 정치와 권력구조』(지식산업사, 2014)
김수태, 『신라중대정치사연구』(일조각, 1996)

논문

김창석, 「통일신라의 천하관과 대일(對日) 인식」(『역사와 현실』 56, 2005)
全德在, 「新羅 中代 對日外交의 推移와 眞骨貴族의 動向 -聖德王~惠恭王代를 중심 으로」(『韓國史論』 37, 1997)
집필자
김창석(강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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