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김포 출생. 경성사범학교를 나와 서울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처음으로 화단에 등장한 것은 1926년 제5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자화상」이 입선되면서부터였다. 다음 해인 1927년 제6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는 「아이」와 「백자와 튜울립」을 출품, 「아이」가 특선되고,「백자와 튜울립」이 입선되었다.
그의 화풍은 인상파의 아류에서 벗어나 점차 야수적이면서도 표현적인 경향으로 옮겨가는 과정을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은 경향은 다음 해인 1928년 제7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특선한 「포오즈」에서 자신의 확고한 조형으로 정착하게 됨을 엿볼 수 있다. 그의 조선미술전람회에서의 활동은 누구보다도 가장 눈부시다. 1927년 특선에 이어 1928년 · 1929년 · 1930년 · 1933년 · 1935년 등 다섯 차례에 걸쳐 특선을 차지하였다.
이와 같은 특선 경력과 실력의 평가는 사후이지만 1936년 조선미술전람회 규정이 개정되고 추천 작가제가 신설될 때 최초의 서양화 추천 작가로 추대되었다. 1930년 서울을 떠나 한동안 동경에서 활동을 펼쳤다. 이과전(二科展) 출품은 이 시기에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그의 화풍은 도일 이전에 확고한 것으로 정착되어 그 뒤 별다른 변모는 찾을 수 없다.
그는 야수파와 표현파라고 하는 대담한 구성과 격정적인 터치의 화풍과 맥락을 같이하였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화풍을 그대로 구현하기보다는 새로운 조형 체험을 극복함으로써 독자적인 감각의 예술을 실현하였다. 그의 독자적인 화풍은 두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아이」 · 「포오즈」 · 「낮잠」 · 「노란 저고리」 등에서 보이듯이 고전적이고 아카데믹한 시각과 구성에서 벗어나 대담한 구도적 변혁을 시도하고 있다. 그리고 완전 측면 또는 완전 정면의 시각과 매우 단순하고 담백한 포즈를 설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는 수묵(水墨)과도 같은 묽은 색조와 일필로 처리한 터치가 특징적이다. 마치 수채화가 지니는 투명하면서도 신선한 질감의 느낌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점은 유화가 지니고 있는 재질상의 특성에서 벗어나 유화를 통해 수묵화의 표현적 체험을 시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바로 이 점이 다른 야수파나 표현파의 경향에 영향을 받은 화가들과 비교되는 그의 독자적 화풍이기도 하다.
개성에서의 개인전에 이어 평양에서도 개인전을 가졌으며, 전시를 갖는 도중 급환으로 평양에서 별세하였다. 친구들이 장사를 지내고 서울에서 유작전을 열어 주었다. 안타깝게도 전하는 작품이 적어 활발한 연구와 평가 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