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등은 급찬(級飡)이었다. 769년(혜공왕 5) 11월 김초정 등 187인이 도송사(導送使) 39인과 함께 대마도(對馬島)에 도착하자, 12월에 일본조정은 원외우중변(員外右中弁) 종4위하(從四位下) 대반숙녜백마려(大伴宿禰伯麻呂) 등을 대재부(大宰府)로 보내어 신라사신의 방문 이유를 물었다.
이에 김초정 일행은 재당대사(在唐大使) 등원하청(藤原河淸)과 학생 조형(朝衡) 등이 숙위왕자(宿衛王子) 김은거(金隱居)의 귀국길에 서신을 보냈으므로 토모(土毛: 공물을 낮추어 표현한 말)와 함께 이를 전한다고 하였다.
일본조정이 다시 공물을 토모라고 개칭한 이유를 묻자 이번 사행(使行)이 정식파견이 아니라 임시로 온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일본조정은 견부사주인주(堅部使主人主)를 보내어, 지난번 사신 김정권(金貞卷)이 귀국할 때 국정을 알려줄 것을 청하였으나, 이번 사행이 사사로운 일에 관한 것이라는 점을 말하고 전례에 따라 사신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다.
한편, 당나라의 상황과 등원하청 등의 서신을 전하여준 데에 감사를 표시하면서 대재부에서 향연을 베풀어주었으며 신라왕에게 명주실〔絲〕100구(絇), 비단 250둔(屯) 등을 보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