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경주(慶州). 아버지는 양양부사(襄陽府使) 김상일(金商一)이다.
1887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부수찬(副修撰)으로 출사(出仕)한 뒤 1890년에는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다.
1900년 정족산성사고(鼎足山城史庫) 소장 『인조실록(仁祖實錄)』 2책이 분실된 사건이 일어나자 겸장례(兼掌禮)로 있으면서 감독을 소홀히 한 죄목으로 탄핵을 받아 고군산도(古群山島)에 유배되었으나, 얼마 뒤 실록이 무사히 환수됨으로써 사면되었다.
한편, 봉상사제조로 있을 때에는 2차에 걸쳐, 사회적으로 점차 그 기능을 상실하여가던 유교를 체계적으로 발흥시키기 위하여 성현의 위호(位號)를 바로잡고 경전(經典)을 교정할 것을 주장하는 내용의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뒤 장례원소경·사직서제조·비서원승·태의원경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