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평야 ()

김포평야
김포평야
자연지리
지명
경기도 김포시의 굴포천(掘浦川) 유역과 한강 하류 남안에 발달된 퇴적평야.
정의
경기도 김포시의 굴포천(掘浦川) 유역과 한강 하류 남안에 발달된 퇴적평야.
자연환경

김포평야의 핵심부는 큰 홍수가 발생하면 물에 잠기는 범람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범람원은 후빙기 해수면 상승이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을 때 빙기에 깊게 파였던 골짜기에 하천의 토사가 현재의 해수면을 기준으로 쌓임으로써 형성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범람원의 해발고도는 매우 낮은 편이다.

범람원은 하천 연안을 따라 분포하는 자연제방과 강물이 역류하는 지류 유역의 배후습지로 구분된다. 자연제방은 인공제방과는 달리 지면이 상당히 넓고 평평한데, 큰 홍수 때만 물에 잠겨 일찍부터 취락의 입지나 밭으로 이용되어 왔다. 자연제방의 뒤에는 고도가 낮아 보통 홍수에도 물에 잠기는 배후습지가 자리한다.

범람원 주변으로는 기복이 아주 작아 평야의 일부로 간주되는 구릉지가 발달해 있다. 구릉지는 하천의 범람으로 인한 침수위험이 없을 뿐 아니라 대개 기반암의 풍화토인 적색토로 덮여 있고, 밭ㆍ과수원ㆍ목장ㆍ임야 등으로 이용되기 때문에 범람원과는 뚜렷이 구별된다. 이러한 구릉지는 대개 배후의 산지지역으로 이어진다.

형성 및 변천

김포평야는 굴포천 유역과 한강 하류의 남안인 김포ㆍ인천ㆍ부천ㆍ서울에 걸쳐 발달된 퇴적평야이다. 배후습지가 넓고 저습했던 김포평야는 일제강점기 초부터 인공제방의 축조가 이루어졌다. 또한 곡류하천이었던 굴포천의 유로도 직강공사를 통해 반듯하게 펴졌다.

광복 후에는 굴포천 하류의 신곡리 양수장, 걸포천 하류의 사우동 양수장 등이 건설되면서 과거에 갈대밭이었던 김포평야가 수리안전답으로 개간되었다. 특히 신곡리 양수장은 1970년대 초에 양ㆍ배수 겸용의 수리시설로 대폭 증설되었고, 이곳에서 퍼 올린 물은 2단 또는 3단 양수장을 통해 김포시 전역으로 보내지고 있다.

김포평야에서 생산되는 밥맛 좋은 김포미, 이른바 ‘통진미(通津米)’는 임금님의 수랏상에 올랐던 진상미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한편 통진면 가현리에서는 5,000년 전에 탄화(炭化)된 쌀이 발견됨으로써 김포평야에서 오래 전부터 벼가 재배되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현황

부족한 수도권의 택지를 원활히 공급하기 위해 1990년대 중반부터 김포평야 일대에는 많은 아파트들이 건설되었다. 그 결과 김포평야의 토지이용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특히 김포시의 풍무동ㆍ감정동ㆍ장기동ㆍ걸포동ㆍ북변동ㆍ사우동 등은 수도권의 새로운 주택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참고문헌

『한국지리지-수도권편-』(국토해양부 국토지리정보원, 2007)
『한국지리-우리 국토의 자연과 인문-』(권혁재, 법문사, 2003)
『한국지리-각 지방의 자연과 생활-』(권혁재, 법문사, 1995)
『한국지지총론』(국립지리원, 1980)
『한국지명요람』(국립지리원, 1982)
『한국지지』-지방편 Ⅰ-(국립지리원, 1984)
「한강하류의 충적지형」(권혁재, 『고려대학교사범대학논집』 11, 1984)
관련 미디어 (3)
집필자
이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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