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하재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대사헌, 동지경연사, 이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양숙(養叔)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745년(영조 21)
사망 연도
1784년(정조 8)
본관
광산(光山)
주요 관직
이조참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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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대사헌, 동지경연사, 이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양숙(養叔). 할아버지는 예조판서 김진규(金鎭圭)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김양택(金陽澤)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69년(영조 45)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듬해 교리가 되고, 1771년 수찬으로 소론 최석항(崔錫恒) 등의 관직을 회복시킨 일이 부당하다고 주장한 조영순(趙榮順)을 변호하였다가 의흥(義興)에 유배되었다. 곧 풀려나 숙종비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지친(至親)으로 첨지중추부사에 특제(特除)되었다.

1775년에 대사간, 1776년 부제학과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1777년(정조 1) 대사성 · 대사간 · 이조참의 등을 역임하고, 1779년 좌부승지가 되어 시폐를 논하고 장문의 「시무칠조(時務七條)」를 올려 정조로부터 성찰하겠다는 회답을 받았다.

이듬해 대사성 · 대사헌 ·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 등을 역임하고, 1781년 이조참판이 되었으나, 제주목사를 천거한 일이 잘못되어 파직당하였다가 곧 복직되었으나, 1784년 윤득부(尹得孚)의 유배와 관련되어 다시 파직당하였다.

그해 영희전고유제(永禧殿告由祭)의 헌관으로 분향 후 정조의 실덕과 사림을 장살(杖殺)할 것 등을 내용으로 한 쪽지를 예방승지(禮房承旨) 이재학(李在學)에게 주었는데, 이 사실이 탄로나 추국된 후 흉칙한 대역부도죄인으로 주살당하였다.

죽은 뒤에 가산이 적몰되고, 파가저택(破家瀦宅: 죄인의 집을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못을 만듦)되었으며, 자녀 · 처 · 숙질 등은 원도(遠道)의 노비가 되었다.

참고문헌

『영조실록(英祖實錄)』
『정조실록(正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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