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나주(羅州). 서울 출생. 중앙중학교를 거쳐, 1943년 일본 제국고등음악학교(帝國高等音樂學校)를 졸업하였다. 작곡은 김성태(金聖泰)와 모로이(諸井三郞)에게 사사하였다. 14세 때 「아 가을인가」를 작곡하였으며, 17세 때 『동아일보』 주최 신춘현상공모에서 가곡 「가려나」로 입상하였다. ‘선토착화 후현대화(先土着化 後現代化)’라는 신념으로 한국적인 작품 개척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12음기법 등의 도입과 민속음악을 바탕으로 한 독창성을 표현하기 위하여 이론 정립과 창작을 병행하였다.
1946년 기악곡으로 「고전풍의 첼로소나타」를 작곡하였고, 1952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를 작곡한 이후 기독교 찬송가를 1,105곡 작곡하였다. 1955년 「바이올린을 위한 산조」가 처음 연주되어 기악곡에서 한국적 표현을 구체화했으며, 이를 계기로 연세대학교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한 한국 정서의 작품 창작의 큰 흐름을 이루어갔다. 작품의 범위는 교향악 · 실내악 · 오페라 · 성악곡 등 다양하지만 대표적인 것은 역시 교회음악이었다.
교육자로서 서울대학교 · 이화여자대학교 · 덕성여자대학교 · 연세대학교 · 세종대학교 · 목원대학교 · 전남대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는데, 1955년부터 1976년까지 가장 오랜 기간을 연세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덕성여자대학교 재직시절에는 최초로 국악과 설립에 기여하였다. 1948년부터 1980년까지 교회에서 성가대를 지휘하였으며 대한합창단 · 운경합창단을 창단하여 지휘를 맡았다. 국제 현대음악협회 한국지부장을 맡아 현대음악 도입에 힘썼으며 한국 양악에 대한 기초자료 수집, 홍난파기념사업, 왜색가요에 대한 비판 이론 제기 등 사회운동에도 참여하였다.
저서로는 음악이론서로 『화성학(和聲學)』 · 『대위법(對位法)』 · 『작곡법(作曲法)』 등 10여 권이 있으며 수필활동도 활발하여 4권을 저술하였다. 새로운 교회음악을 구축하기 위하여 운경교회도 설립하였으며, 음반과 음악서를 수집하여 한국민속음악박물관 · 운경음악도서관을 설립하였다. 서울시 문화상과 문화방송 가곡공로상을 수상하였으며,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