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공제(公濟), 호는 화은(華隱). 할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남치욱(南致勗)이고, 아버지는 장례원사평 남언진(南彦縝)이며, 어머니는 서성도정(西城都正) 이숭(李崇)의 딸이다. 작은아버지가 남언경(南彦經)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문장에 능했으며,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업했다.
1588년(선조 21) 생원시에 합격하고, 임진왜란이 끝난 뒤 1602년(선조 35) 처음 음보로 의금부도사가 된 뒤 종묘서직장을 거쳐, 호조좌랑·감찰이 되었다.
1605년 보은현감이 되었다가, 1610년(광해군 2)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했다. 이후 공조·예조의 좌랑, 호조·예조의 정랑이 되어 1611년(광해군 3)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13년 정언·헌납·전적·문학이 되었고 다시 헌납 겸 춘추관기주관이 되었다.
이때 호조판서 황신(黃愼)이 이이첨(李爾瞻) 일당의 모함으로 탄핵을 받게 되자 그 무고함을 논하여 체직당했다. 수년 뒤 다시 등용되어 문학·필선·장령을 거쳐, 1615년 영천군수가 되어 통정대부의 품계에 올랐다. 1619년(광해군 11) 성절사로서 중국에 다녀온 후 1621년 삼척부사가 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광해군 때의 훈계가 모두 깎아내림을 당하여 통훈대부로 강등되고 유배의 벌을 받았으나 곧 풀려나와 종묘서령이 되었다. 이어 군자감·통례원·상의원의 정이 되었으며, 벼슬을 그만두고는 온양에 은거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 요직에 불리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사후에 승정원도승지로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