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당(朴世堂)이 남인(南人)의 집권과 함께 양주(楊州) 석천(石泉)에 물러나 은거하던 시절, 그의 나이 54세에 지었다.
조선조는 유가(儒家) 독존의 기풍으로 도가(道家)나 불가(佛家)에 대한 사대부들의 저술이 거의 전무하다시피하였다. 장자에 관한 전문 저술은 지금 이 남화경주해와 한원진(韓元震)의 ≪장자변해(莊子辨解)≫가 있을 뿐이다.
≪장자변해≫가 장자 내편(內篇)을 위주로 자신의 견해를 논술한 것임을 감안하면 전체를 구절구절 다룬 본격적인 장자주석서로는 이 책이 유일하다 할 것이다.
박세당은 “노장(老莊)의 설이 비록 성인(聖人)의 대법(大法)과는 다르지만 취할 만한 점이 있는데, 그것을 적절히 가려 쓰지 않고 전체를 내버린 것은 잘못”이라고 저술의 취지를 적고 있다.
이 책에는 중국의 장자 주석가 40여 인의 작품이 원용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곽상(郭象)과 임희일(林希逸)의 견해를 많이 참고하고 인용하였다. 곽상이 위진(魏晉)시대의 현학(玄學)을 대표하는 주석가라면, 임희일은 유가적 흥취를 보이는 주석가이다.
박세당은 한 문장이라도 스스로 오래 음미하는 과정에서 여러 주석들의 장단점과 시비를 자득(自得)할 수 있었다고 말하면서 올바른 주석을 달기가 참으로 어렵다고 토로한 바 있다.
그는 장자의 여러 편 가운데 <내편>과 <우언(寓言)>·<천하(天下)> 등 9편을 장자의 의도를 가장 잘 보여주는 편으로 선정하였다. 박세당은 장자의 본래 의도는 유가와 묵가(墨家)가 아닌 명가(名家)인 혜시(惠施)의 무리를 비판하고 변척하는데 있다면서 장자를 유가의 틀 안에서 해석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만일 유가의 본지와 어그러지는 경우에는 장자의 논의 자체를 자유로이 비판했다. 그는 근본적으로 유학자였던 것이다.
예를 들면 <소요유(逍遙遊)>에서 장자는 허유(許由)라는 인물을 내세워 사회적 질서와 규범의 대표인 요(堯)를 비웃고 있는데 이같은 기세적(譏世的) 자세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응수했다.
그의 유가적 입장은 <제물론(齊物論)>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곽상은 도가적 발상에 서서 우주를 움직이는 중심적 존재가 없으며 각각의 자율과 조화를 말하는데 비해 박세당은 유가의 이(理) 중심주의에 입각해 조화(造化)의 주체를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영원의 주재(主宰)의 관점에서 보면 물(物)의 생성과 변화의 다양성을 통일적으로 설명할 수 있고, 또한 이를 통해 사람들의 분분한 사적 논의를 정리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