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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궁중에서 봉직하던 빈(嬪) · 귀인(貴人) · 소의(昭儀) · 숙의(淑儀) 등 여관(女官)의 총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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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시대 궁중에서 봉직하던 빈(嬪) · 귀인(貴人) · 소의(昭儀) · 숙의(淑儀) 등 여관(女官)의 총칭.
개설

내명부(內命婦)는 외명부(外命婦)에 대칭되는 명칭으로, 조선 초기부터 ‘내관’ 또는 ‘여관’ 등으로 불렸다가 성종 대에 와서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내명부’라 명시되고, 조선 말기까지 수정 없이 그대로 일컬어졌다. 그 기능은 궁중에서 각각 맡겨진 직무에 따라 공적인 일부터 사사로운 시중까지 다양하게 국왕 및 왕실을 보필하였다.

내용

전제적 왕권이 확립된 삼국시대 이래, 궁중의 운영을 위한 비빈(妃嬪) 중심의 궁녀 조직을 계승하고 공조직화 한 것이 고려의 내직제도이다. 그러나 고려 말까지도 비빈을 비롯한 궁녀 조직은 일정한 규범을 갖추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조선 초에 고려의 내직제도를 바탕으로 중국 당 · 송 · 명나라 등의 제도를 참고한 내명부 제도가 성립되었다.

고려 말기에는 여성 생활이 자유 분방해 궁중 여성들의 생활에도 퇴폐적인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러한 분위기는 조선에 들어와서도 여전하여 유교 이념을 가진 관료들의 신랄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따라서 새로운 왕조의 지배 질서를 정비해가면서, 한편으로는 유교적 여성관을 확립시켜갔다.

조선이 건국된 1392년(태조 1) 9월, 대사헌 남재(南在)가 상소에서 여성들의 풍속을 바로잡자는 주장을 하였다. 또한 정도전(鄭道傳)은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을 편찬하면서 유교 정치이념에 입각한 재상 중심의 정치체제의 확립과 함께 궁중 질서가 바로잡혀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가장 영향력 있는 총재(冢宰)가 궁중의 아주 작은 일까지 관여해야만 왕의 사생활을 바르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따라 1397년(태조 6) 3월, 상서사판사(尙瑞司判事) 조준(趙浚)과 정도전이 건의한 내관제도가 입안, 제정되었는데, 『경국대전』의 내명부와 비교해 차이가 크긴 하나 그 모태를 이루었다. 1년 뒤인 1398년(태조 7) 윤5월 의정부와 중추원의 양부에서 도태시키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한 주장의 명분은 녹의 남용이었다. 이 건의는 받아들여져 여관의 녹은 폐지되었다.

그러나 태종은 1401년(태종 1)에 태상전(泰上殿 : 太祖宮) 여관의 월봉을 부활시키고, 하륜(河崙)과 권근(權近) 등에게 하(夏) · 은(殷) · 주(周)나라 3대 이하 역대 군왕의 비빈 · 시녀의 수와 고려 역대 비빈 · 시녀의 수를 상고하여 아뢰게 하였다. 이것은 왕실의 권위와 질서의 확립을 위해 여관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자신의 여관을 세우려는 의도였다. 이러한 준비 끝에 1405년(태종 5) 부왕의 내관보다 작은 규모인 12인의 여관을 두었다. 이때 수가 많고 적은 것이 문제는 아니었으므로 사간원의 강력한 여관 혁파 상소에 부딪쳐 왕도 일단 승복할 수밖에 없었으나 실상은 그대로 존속되었다.

이와 같이 태조와 태종은 대신들의 내관 제도에 대한 몰이해와 혁파의 고난을 겪었으나, 세종 때에는 그 분위기가 일변되었다. 그리하여 1428년(세종 10) 3월 이조의 건의로 태조 · 태종 때의 제도를 바탕으로 당나라의 제도를 참작해 품계 · 명칭 · 인원 · 소장 사무 등을 구체적으로 규정한 제도가 마련되었다. 여기서 특별히 주목되는 것은 왕을 모시는 내관과 궁중의 모든 일을 처리하는 궁관(宮官)이 구별되고 있는 점이다. 인원은 태조 때와 같으나, 내관과 궁관의 명칭이 좀 더 세분화되었고 직무가 구체적으로 명시되었다.

『경국대전』에서는 태조 · 태종 · 세종의 3대에 걸쳐 시행된 제도를 검토하여 취사 선택하고 규모만 약간 늘린 상태에서 법제화하게 되었다. 내명부를 크게 내관과 궁관으로 구별하고 문무 관제에 준하여 18등급의 품계가 정비되었다. 인원은 35인으로, 『예기(禮記)』의 왕제편(王制篇)의 삼세부(三世婦) · 오처(五妻) · 이십칠첩(二十七妾)의 수에 일치하고 있다.

한편, 동궁을 위한 내관제도가 1430년(세종 12)에 논의되었다. 예조에서 『의례경전통해(儀禮經典通解)』와 『예기』를 들어 “천자 제후의 세자도 제후의 예로써 군과 동등하게 취할 것”을 건의하였다. “동궁의 후궁은 『경제예전(經濟禮典)』에 따라 훌륭한 가문에서 잘 가려 뽑아 수를 갖추되, 1430년(세종 12)의 내관제와 당나라의 태자 내관제에 준해 정할 것”을 청해 세자궁의 내관제도가 제정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윤12월에는 세자의 품위도 정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1품보다 윗자리에 있게 하고 중국에 비해서는 2품에 해당하게 하였다. 이 문제를 조선에서는 동궁 내관의 관제 · 칭호 · 품질 등에 옛 제도를 참고해 다시 정하였다. 즉, 동궁은 왕에 비해 전체적으로 직의 등급이 낮고 그 규모도 작았다. 품계는 1품은 없고 정2품 양제(良娣)부터 정5품 소훈(昭訓)까지가 동궁 후궁인 내관이며, 종6품 사규(司閨)부터 종8품 장의(掌醫)까지는 궁관이다. 품계에서 내관은 정품(正品)으로만 되었고, 궁관은 종품(從品)으로 구별하였다. 인원수는 내관 4인, 궁관 9인으로 총인원 13인이었다. 왕에 비해 품계도 낮고 규모도 작았으나 맡은 사무는 비슷하였다. 『경국대전』에는 세종 때의 제도를 수정, 보완하여 법제화하였다.

국가 최고의 정청인 동시에 국왕의 사가(私家)인 궁중 운영은 자연히 많은 여성을 필요로 하였다. 궁중의 여성 조직은 국왕의 배우자로서 품계를 초월한 왕비와 직임을 가진 내명부, 그리고 품계가 없는 궁인인 잡역 궁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내명부는 품계를 받은 자로서, 위로는 국왕과 왕비를 모시고 궁중 내의 일정한 직임을 맡아보며, 아래로 잡역 궁인을 부렸는데, 『경국대전』에 따르면 크게 두 계층이 있었다. 정1품 빈부터 종4품 숙원까지는 왕의 후궁 층으로 내관이라 하고, 정5품 상궁부터 종9품 주변궁(奏變宮)까지는 상궁 층으로 궁관이라 하였다.

이들은 품계 · 명칭 · 직무가 다르듯이, 신분 또한 달랐다. 이들의 출신 성분을 보면 삼국시대에는 천인 출신도 있었으나, 고려시대에는 대부분 귀족 출신들이었다. 그러나 고려 말기에 와서는 천인 출신도 적지 않았다.

조선 초기의 후궁은 신분이 좋은 가문에서 정식으로 맞아들인 후궁과 한미한 집안 출신의 궁녀로 승은을 입은 후궁으로 나눌 수 있다. 정식 후궁은 처음부터 왕비나 세자빈처럼 가례색(嘉禮色)을 설치하여 전국의 혼기에 있는 처녀들에게 금혼령을 내리고 간택하여 빙례를 갖추어 맞아들인 경우이다. 그러나 태조 · 정종 때에는 제도가 미비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가례색에 의한 간택은 없었다. 단지 몇몇 대신들이 딸을 바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는 천한 가문의 딸로서 승은한 것은 아니었다.

태종 때 예조에서 우리나라도 중국 제후의 일취구녀제(一娶九女制)에 준해 1왕비, 3세부, 5처제를 채택하되, 칭호만은 세부를 ‘빈’이라 하고 처를 ‘잉(媵)’이라 하는 ‘3빈 5잉제도’의 도입을 건의하였다. 이에 태종은 『예기』의 ‘제후부인입삼궁(諸侯夫人立三宮)’의 제도를 따라 1빈 2잉제를 명령하였다. 왕의 명령에 따라 가례색을 설치하여 간택하고 빙례로 맞아들인 정식 후궁이 바로 정의궁주(貞懿宮主)이다.

태종은 후궁 간택의 중요성을 인군 계사(人君繼嗣)와 중인 내조(衆人內助)에 있다고 보았다. 때문에 자신이 정한 1빈 2잉제를 채택했지만, 그 수에 얽매이지 않고 3, 4빈잉을 더 두었다면서 아들 세종의 빈잉도 더 두고자 하였다. 이후의 왕들은 그 시대 상황에 따라 한두 번 정도 정식 후궁을 맞아들이기도 하였다. 조선 중기와 후기에는 왕비의 분만 가능성이 없을 때, 대통을 이을 왕자를 낳기 위해 특별히 간택한 경우가 있었다. 정조의 후궁 원빈(元嬪)과 순조의 생모 수빈(綏嬪) 등이 그에 해당한다.

승은한 후궁은 시녀 · 관비 · 사비 · 창기 · 과부 등의 미천한 출신으로 왕에게 승은을 입고 일약 후궁이 되는 경우이다. 대개 왕의 총애를 받거나, 왕자를 낳거나, 공로가 있는 경우에만 봉작 또는 재차 승격된 기록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정식 후궁에 비해 문헌상 나타나지 않은 승은한 후궁이 많았을 것이다.

조선 중 · 후기에 승은한 후궁으로는, 세자의 생모가 된 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 이씨(暎嬪李氏)와 광해군의 생모가 된 공빈 김씨(恭嬪金氏), 경종의 어머니 희빈 장씨(禧嬪張氏), 그리고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淑嬪崔氏) 등이다. 이들은 비록 한미한 집안 출신들이었으나, 세자와 왕의 생모로서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그러나 지존한 왕비에게는 절대로 미치지 못하였다.

궁관은 일정한 직임과 품계를 가지고 궁중 운영의 핵심이 되었던 계층이다. 위로는 왕비와 내관을 받들고, 아래로는 품계를 받지 못한 잡역에 종사하는 하층 궁녀를 부렸다. 세자궁에도 역시 내관과 궁관으로 구별되었다. 규모는 대전(大殿)을 축소한 상태이며 조직과 기능은 대전과 비슷하였다.

내명부의 직무를 구체적으로 명시한 것은 『경국대전』보다도 1428년(세종 10)에 만든 제도이다. 기능이 내관과 궁관으로 크게 양분되고 품계에 따라 각기 고유의 직무가 부여되었다. 내관인 정1품 빈(嬪)과 귀인(貴人)은 왕비를 도와 부인의 예를 의논하며, 정2품 소의(昭儀)와 숙의(淑儀)는 왕비의 예를 돕고 의논하였다. 정3품 소용(昭容)과 숙용(淑容)은 제사지내는 일과 손님을 접대하는 일을 맡으며, 정4품 소원(昭媛)과 숙원(淑媛)은 왕이 평상시에 한가롭게 거처하는 전각을 관장하고, 명주와 모시를 길쌈해 해마다 바쳤다. 내관의 궁중 활동은 부여된 직무에만 한정한 것은 아니었다.

내관은 종친의 내연(內宴)에 왕비를 따라 참석했으며, 태종의 후궁인 정의궁주는 명나라 후궁 권파파(權婆婆)와 사신을 중계로 서신과 선물을 주고받으며 교제도 하였다. 왕비의 온수현 행차 때에도 내외 명부가 나가서 전송했고, 왕비 간택에서도 여러 종친 부인들과 공주들이 함께 참석하였다. 또한 왕비가 친잠례(親蠶禮)를 행할 때도 내외 명부들이 따라서 행했던 기록을 많이 볼 수 있다. 때로는 왕비의 소생을 길러주기도 하여 맡은 일 외에도 그 당시의 형편에 따라 다양하게 활동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내관(후궁)들은 왕의 총애와 공로에 따라 예우를 받았다. 총애 받는 후궁에게는 봉작 또는 승격의 영예가 내려졌다. 태종의 후궁인 정의궁주에게는 연못을 파준 예도 있으며 온수현에 요양가는 특전이 베풀어지기도 하였다. 그 밖에도 외국 사신에게 선물을 받는 등 여러 가지의 대우를 받았다. 그러한 은전은 본인뿐만 아니라 내관의 족친들에게까지 주어지기도 하였다.

반면, 출궁 당하거나 징계 받는 경우도 많았다. 태종은 숙공궁주 김씨(淑恭宮主金氏)를 친정으로 돌려보냈는데, 그녀의 아버지인 김점(金漸)의 죄를 국문할 때, 공의와 사은을 분명히 하기 위한 것이었다. 세종에게 한 어린 후궁이 작은 일을 청했을 때 물리친 일 등은 단편적인 사실이기는 하나 왕의 후궁에 대한 양면성을 엿볼 수 있다.

궁관은 국왕의 시위와 궁중 실무를 맡았다. 상궁(尙宮)은 정5품으로 왕비를 인도하며, 정6품인 사기(司記)와 정7품인 전언(典言)을 통솔하였다. 사기는 궁내의 문서와 장부의 출입을 맡았으며, 전언은 백성에게 널리 알리고 왕에게 아뢰는 중계 구실을 하였다.

상의(尙儀)는 정5품으로 일상 생활에서의 모든 예의와 절차를 맡았고, 정6품인 사빈(司賓)과 정7품인 전찬(典贊)을 통솔하였다. 사빈은 손님을 접대하고 신하가 왕을 뵐 때의 접대, 그리고 잔치를 관장하고 왕이 상을 주는 일 등을 맡아 처리하였다. 전찬은 손님 접대와 신하가 왕을 뵐 때의 접대와 잔치, 그리고 정승을 도와서 앞을 인도하는 일 등을 맡았다.

상복(尙服)은 종5품으로 의복과 수로 무늬 놓은 채장(采章)의 수량을 공급하고 정6품의 사의(司衣)와 정7품인 전식(典飾)을 통솔하였다. 사의는 의복과 머리에 꽂는 장식품의 수식을 맡았으며, 전식은 머리 감고 화장하는 고목(膏沐)과 세수하고 머리 빗는 건즐(巾櫛)을 맡았다.

상식(尙食)은 종5품으로 음식과 반찬을 종류대로 가지런히 준비하고, 정6품인 사선(司膳)과 정7품인 전약(典藥)을 통솔하였다. 사선은 삶고 졸여 간을 맞추는 반찬을 만들었고, 전약은 처방에 의한 약을 맡았다.

상침(尙寢)은 정6품으로 왕을 보통으로 뵐 때와 왕이 옷을 입고 먹는 일인 진어(進御)하는 순서를 맡았고, 정6품인 사설(司設)과 정7품인 전등(典燈)을 통솔하였다. 사설은 피륙을 여러 폭으로 둘러친 포장인 위장(幃帳)과 왕골로 만든 자리인 인석(茵席), 그리고 물을 뿌리고 먼지를 쓰는 쇄소(灑掃)하는 일과 물건을 내놓고 베풀어놓는 장설(張設) 등을, 전등은 등불과 촛불을 맡았다.

상공(尙功)은 정6품으로 여공(女功)의 과정을 맡았고, 정6품인 사제(司製)와 정7품인 전채(典綵)를 통솔하였다. 사제는 의복을 만들었고, 전채는 비단과 모시 등 직물을 맡았다. 궁정(宮正)은 정5품으로 궁녀들의 품행과 직무에 대하여 단속하고 죄를 다스리는 구실을 하였다. 전정(典正)은 정7품으로 궁정의 일을 도왔다.

이러한 직무 외에도 기록에 의한 활동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 초기에는 제도가 정비되어 가는 과도기였으므로 궁관 층과 잡역 궁인을 구별 없이 기록하고 있어 내용으로만 추측해볼 수 있을 뿐이다. 실제로 궁관의 명칭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문종 때부터이다. 이는 1428년(세종 10) 제도가 제정된 이후 서서히 일반적으로 명칭이 정착되었음을 볼 수 있다.

궁관은 왕비의 친정아버지 상(喪)에 왕비를 따라서 상복을 입고, 왕 및 왕비가 죽었을 때에도 참최복(斬衰服)을 입으며, 동궁의 배필 간택 때에도 부분적으로 참여하였다. 또한, 왕비의 온수현(溫水縣) 행차 때에도 내관과 함께 전송을 나갔으며, 1457년(세조 3) 왕비의 헌수 의식(獻壽儀式)도 궁관이 완전히 맡아서 담당하였다.

또 이들은 국가로부터 대우를 받았는데, 내관은 예외였지만 궁관은 녹을 받았다. 죽었을 때에는 상장(喪葬)에 필요한 미두(米豆) · 정포(正布) · 지(紙) · 관곽 등의 부의를 내려주고, 공로가 있을 때에는 특별한 혜택도 주었다. 그러므로 내명부는 왕과 왕비의 일상 생활에 걸친 모든 시중을 드는 궁중 생활에 있던 하나의 단체라 할 수 있다. →외명부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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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송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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