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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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사
제도
조선시대 내명부(內命婦)의 궁관계층(宮官階層)에 속하는 정5품의 여관(女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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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시대 내명부(內命婦)의 궁관계층(宮官階層)에 속하는 정5품의 여관(女官).
내용

상궁은 고려시대에 처음 기록이 보인다. 즉, 『고려사』 「백관지」에 내직(內職)으로서 현종 때 상궁(尙宮) · 상침(尙寢) · 상식(尙食) · 상침(尙針)의 직이 있었다 하고, 또 현종의 「세가」에서는 22년 3월 궁인(宮人) 한씨로 상궁, 김씨로 상침, 한씨로 상식, 서씨로 상침을 삼았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다. 그러나 자료가 없어 그 이상의 것은 알 수 없다. 상궁제도는 중국의 수나라에서부터 시작되어 당 · 송 · 명나라에 이르기까지 존속하였다. 그러다가 그 뒤 청대에 이르러 폐지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조선시대에 내명부제도가 정비됨에 따라 상궁은 궁관의 가장 높은 위치에서 궁내 사무를 총괄하였다.

내명부는 크게 나누어 내관과 궁관으로 구분된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내관은 정1품의 빈(嬪)에서 종4품의 숙원(淑媛)에 이르는 여관으로서 왕의 측실(側室)이다. 궁관은 정5품의 상궁에서 종9품의 주변궁(奏變宮)에 이르는 여관으로서 그 칭호에 따라 직책이 나누어져 있었다. 내명부제도는 1428년(세종 10) 3월 이조(吏曹)에서 당제(唐制)와 역대의 연혁을 참조, 정1품의 빈에서 정7품의 전정(典正)에 이르는 여관의 제와 그 직분을 상정(詳定)하여 계달한 것이 조선시대 여관제도의 근간이 되었다. 그리고 그 뒤 약간의 첨설(添設)을 가해 『경국대전』에 법제화되었다.

세종 때 제정된 상궁의 직분을 보면, 중궁(中宮)을 안내하고 사기(司記) · 전언(典言)을 통솔했다고 하는데, 사기는 정6품 1인으로 궁내의 문부(文簿)와 출입(出入)을 맡고, 전언은 정7품 1인으로 선전(宣傳)과 계품(啓禀)을 맡는다고 되어 있다. 사기는 『경국대전』에서 상기(尙記)로 바뀌어 종6품으로, 전언은 품질만 종7품으로 떨어졌다. 상궁의 신분은 양인(良人)에 속하며, 원칙으로는 내관과 엄격히 구분되었다. 그러나 왕과 육체 관계를 맺게 되면 내관으로 승격하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세종실록(世宗實錄)』
『경국대전(經國大典)』
「조선초기(朝鮮初期) 내명부(內命婦)에 대하여」(이영숙, 『역사학보』 96, 1982)
「조선초기(朝鮮初期) 내명부(內命婦)에 대하여」(이영숙, 『역사학보』 96,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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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송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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