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유한(維翰). 아버지는 노일(盧馹)이다.
1588년(선조 21)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 동래교수(東萊敎授)가 되어 1592년 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휴가를 얻어 귀가하여 있다가 왜적이 침입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동래로 달려가 “죽더라도 성현의 위패를 전화(戰禍)에 버려둘 수 없다.”하고 위판을 먼저 봉안한 뒤 성으로 들어가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 양산군수 조영규(趙英珪) 등과 끝까지 성을 지키다 전사하였다.
시서(詩書)를 팔뚝에 매고 다닐 정도로 학문에 대한 정성이 지극하여 선비들로부터 많은 추앙을 받았으며, 일찍부터 공명에 마음을 두지 않다가 부모의 권유로 마지못해 과거에 응시하여 벼슬길에 나가 장렬히 일생을 마치자 많은 선비들이 애석해하였다. 뒤에 도승지에 추증되고 동래의 충렬사(忠烈祠), 밀양의 충효사(忠孝祠)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