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광주(光州). 초명은 노극복(盧克福). 자는 길보(吉甫), 호는 월화당(月華堂). 아버지는 생원 노대성(盧大成)이다.
정경세(鄭經世)의 문인으로 일찍부터 재주가 뛰어나 7, 8세에 시를 짓고 학문에 뜻을 두었다.
정온(鄭蘊)·심광세(沈光世)·임진무(林鎭懋) 등과 함께 성리학을 깊게 연구하고 토론하며 절차탁마(切磋琢磨)하였다.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고성(固城)으로 유배갈 때 당시 수찬으로 있던 심광세는 초계(草溪)에 있는 군자유(君子儒)라고 소개하였는데, 노극복을 찾아본 인조는 학식의 해박함에 감탄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뒤 유일(遺逸)로 등용되어 곧 이조정랑에 올랐으나 벼슬보다 학문에 열중하기 위하여 사직, 고향에 내려와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고성에서 창의(倡義), 조도사(調度使) 이준(李埈)을 도와 군량미 조달에 진력하였다. 그 뒤 호소사(號召使) 정경세의 천거로 오수도찰방(獒樹道察訪)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