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극복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이조정랑, 오수도찰방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길보(吉甫)
월화당(月華堂)
이칭
노극복(盧克福)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73년(선조 6)
사망 연도
1635년(인조 13)
본관
광주(光州)
주요 관직
오수도찰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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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이조정랑, 오수도찰방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광주(光州). 초명은 노극복(盧克福). 자는 길보(吉甫), 호는 월화당(月華堂). 아버지는 생원 노대성(盧大成)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정경세(鄭經世)의 문인으로 일찍부터 재주가 뛰어나 7, 8세에 시를 짓고 학문에 뜻을 두었다.

정온(鄭蘊)·심광세(沈光世)·임진무(林鎭懋) 등과 함께 성리학을 깊게 연구하고 토론하며 절차탁마(切磋琢磨)하였다.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고성(固城)으로 유배갈 때 당시 수찬으로 있던 심광세는 초계(草溪)에 있는 군자유(君子儒)라고 소개하였는데, 노극복을 찾아본 인조는 학식의 해박함에 감탄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뒤 유일(遺逸)로 등용되어 곧 이조정랑에 올랐으나 벼슬보다 학문에 열중하기 위하여 사직, 고향에 내려와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고성에서 창의(倡義), 조도사(調度使) 이준(李埈)을 도와 군량미 조달에 진력하였다. 그 뒤 호소사(號召使) 정경세의 천거로 오수도찰방(獒樹道察訪)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였다.

참고문헌

『광주노씨세보(光州盧氏世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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