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광주(光州). 초명은 노조동(盧祖同), 자는 공서(公瑞), 호는 묵재(墨齋). 고성(固城) 출신. 아버지는 사간(司諫) 노선경(盧善卿)이며, 어머니는 우의정 성봉조(成奉祖)의 손녀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당초부터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김종직의 문하에서 김굉필(金宏弼)과 함께 학문에만 전념하며 안우(安遇) · 유호인(兪好仁) · 강흔(姜訢) 등과 교유하였다. 중종이 거듭되는 천재(天災)로 일사(逸士)를 천거하도록 각 도관찰사에게 명하자 학행이 뛰어나 1508년(중종 3), 1510년 두 차례에 걸쳐 천거되기도 하였다.
1518년(중종 13) 경상도관찰사 김안국(金安國)은 우의가 돈독하고 불순함이 없으며 고인(古人)의 법에 따라 행동, 유림들의 추앙을 받음 등을 들어 천거하여 6품직에 특채되었다.
그리하여 내섬시주부 · 장흥고령(長興庫令) · 지평을 거쳐, 1519년 공조좌랑을 역임한 뒤, 경상도도사로 재직 중 기묘사화 때 김안국의 일파로 몰려 관직을 삭탈당하고 유배되었다.
그 뒤 풀려나 고향인 고성에 내려가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538년(중종 33)에 신원(伸寃: 억울하게 입은 죄가 풀림)되어 직첩을 환급받았다. 초계(草溪)의 송원서원(松原書院), 고성의 갈천서원(葛川書院)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