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화계(洋畫界) 형성기의 미술그룹으로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온 박광진(朴廣鎭)·김주경(金周經)과 서울에서 독학한 심영섭(沈英燮)·장석표(張錫豹)가 발기회원으로 참여하였다.
1929년 5월에 천도교기념관에서 첫 회원작품전을 가졌는데, 그 움직임은 매우 주목할만한 것이어서 신문에 평문(評文)이 실리고 주위의 격려가 따랐다.
1931년 4월에 역시 천도교기념관에서 개최된 2회전에는 때마침 동경미술학교 유학을 마치고 온 오지호(吳之湖) 등이 새 회원으로 가입하여 한층 활기를 보였다.
그들의 작품은 각기 비법적 특색을 가지고 표현 취향을 달리하여 미술계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양화의 토대 건설과 민중화(民衆化)를 위한 계몽의 필요성’을 내세우며, 2회전 때에는 신인작품 공모까지 시도하였다.
그 때의 공모작품에는 서울뿐 아니라 평양 등지에서도 응모하였고, 윤중식(尹仲植) 등이 중학생으로 입선하기도 하였다.
최초의 본격적 양화가그룹으로서 회원들은 모두 패기와 이념에 넘쳐 있었으나, 활동범위를 너무 넓히려고 한 과욕 등이 현실적 어려움을 가져와, 발전적 지속을 하지 못한 채 2회전으로 중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