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맹아학교 ()

대구맹아학교
대구맹아학교
단체
광복 직후 대구에 설립된 사립 초 · 중등 특수교육기관.
정의
광복 직후 대구에 설립된 사립 초 · 중등 특수교육기관.
개설

현재의 대구영화학교(大邱榮話學校)와 대구광명학교(大邱光明學校)의 전신이다. 1946년 4월 대구맹아학원(大邱盲啞學園)으로 설립되어 맹아와 농아의 교육을 실시하였다.

설립목적

평생을 나환자촌 목사로 봉사해오던 이영식(李永植)은 사회에서 외면받고 있는 장애자들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여 당시 경상북도 보건후생부장 조용해, 후생과장 주병환 등과 함께 설립하였다.

연원 및 변천

대구시 중구 서성로의 중앙교회에서 맹아동 2명, 농아동 10명으로 입학식과 개교식을 가졌다. 맹·농아자로 하여금 기독교정신에 입각한 ‘사랑·빛·자유’의 이상 실현과 ‘큰 뜻을 품어라’라는 교훈 아래, 국민교육과 생활기능을 익히게 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설립 당시 수업연한 6년에 6세 이상의 맹·농아자를 입학대상으로 하였으며, 초대 교장에 이영식이 취임하였다.

그 뒤 대구 제일교회와 이영식의 사택 등으로 수업장소를 옮겨다니다가 1948년 2월 태평로에 교사를 정하고 정착하였으며, 1953년 11월 현재의 위치로 신축, 이전하였다. 1951년 농아학생을 위한 중등부가, 1952년 맹학생을 위한 중등부가 신설되어 맹·농아학생에 대한 중등교육이 시작되었다.

1953년 3월 농아학생을 위한 대구영화학교와 맹학생을 위한 대구광명학교로 분리되었으며, 1964년 두 학교에 고등부가 생겨 대학진학의 길을 열어주고 직업훈련을 시킬 수 있게 되었다.

기능과 역할

교육내용은 초등부·중등부에서는 일반학교와 마찬가지로 교과영역과 특별교육활동을 과하며, 교육방법은 맹학생에게는 점자나 맹인용 자료를 쓰고, 농아학생에게는 수화(手話)나 구화(口話)를 섞어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시각장애와 청각장애에서 발생하는 학력손실이 크기 때문에, 이를 극복시키기 위한 교육을 별도로 가하는 것이 특색이다. 특히 맹학생에게는 생활적응훈련을, 농아학생에게는 요육활동(療育活動)을 조기에 실시하여 학력손실을 극소화하고 사회적응력을 신장시키고 있다.

고등부에서는 직업재활교육을 실시하여 농아학생에게는 목공·공예·표구·자수·미용·원예·민속공예 등을 실시하고, 맹학생에게는 안마·침구(鍼灸)·지압·마사지·피아노조율·원예·전화교환 등의 직업훈련을 실시하는 동시에 진학의 길을 마련하고 있다.

현황

학교의 조직은 1997년 현재 대구영화학교가 유치부·초등부·중등부·고등부의 11학급에 재학생 112명이며, 교사는 16명이다. 대구광명학교는 유치부·초등부·중등부·고등부의 12학급으로 재학생 87명이고 교사는 21명이다. 졸업생의 상당수가 사회에서 기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대구맹아학교는 광복 후 최초로 세워진 사립특수학교로서 우리나라 특수교육 발전에 선구자적, 활력소적 구실을 하였으며, 이 학교가 모체가 되어 1966년 정신지체아를 위한 대구보명학교(大邱保明學校), 지체부자유아를 위한 대구보건학교(大邱保健學校), 1983년 정서장해아동을 위한 대구덕희학교(大邱德喜學校) 등이 설립되었다.

특히 1956년 한국사회사업대학(지금의 대구대학교)이 설립되어 특수교사 양성에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대구특수교육사』(김병하, 대구대학교출판부,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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