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학병 의거 ( )

근대사
사건
1944년 8월 강제 징집되어 대구 24부대(대구 80연대)에서 훈련받던 조선인 학병들이 일제에 저항하여 일으킨 의거.
정의
1944년 8월 강제 징집되어 대구 24부대(대구 80연대)에서 훈련받던 조선인 학병들이 일제에 저항하여 일으킨 의거.
역사적 배경

태평양으로 전쟁을 확대한 일제는 1943년 조선인 학도 육군특별지원병제도를 공포하여, 강제로 조선인 학생들을 전장에 끌어들였다.

그래서 전국 각지의 조선인 청년들이 일제의 침략 전쟁에 끌려가게 되었다. 그런데 강제 징집된 학병들은 소집된 부대에서 집단생활을 하면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일제에 항거하였다.

1944년 전쟁의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더욱 강화된 일제의 탄압에서 벗어나기 위해 함흥·평양 등지에서 학병 의거를 일으켰는데, 연속선상에서 대구에서도 학병 의거가 일어난 것이다.

경과와 결과

1944년 1월 대구 24부대로 소집된 경상남북도 출신의 학도병 중 대부분이 중국 대륙의 격전지로 끌려가고 27명만 남게 되었다. 이 때 권혁조(權赫朝)·문한우(文漢雨)·김이현(金而鉉) 등을 중심으로 의거 계획이 수립되었다. 이들은 모두 학생시절 항일 운동에 가담한 경험이 있었다.

이들의 다음과 같이 계획을 세웠다. 첫째, 징용에 끌려갈 동포들을 도피시킨다. 둘째, 탄약고를 폭파하고 무기를 탈취하여 일본 군인을 몰살한다. 셋째, 독약을 구하여 일본군의 음식에 투입한다. 넷째, 학병들이 단합하여 집단 탈출을 감행한다는 등의 방법들을 수립하고 하나씩 추진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두 번째·세 번째 계획은 여건이 좋지 않아 성공하지 못하였으나, 징용에 끌려갈 동포를 여러 차례 집단적으로 탈출시키는 커다란 성과를 보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학병을 탈출시키기 위한 계획은, 처음에는 집단 탈출하여 지리산으로 들어가 일단 대열을 정비한 다음, 국외로 빠져나가 독립 투쟁에 참가하려고 하였다.

1944년 8월 8일 밤, 몇 차례 시도 끝에 결국 부대의 하수구를 통해 6명의 학병이 탈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들은 일단 팔공산으로 들어가, 일본 군대와 경찰의 포위망을 뚫고 은신처를 찾아 나섰으나 4명이 붙잡히고 2명 만 탈출할 수 있었다. 붙잡힌 4명은 4년 또는 5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였으며, 탈출한 학병 중 한 사람은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 단체에 가담해서 활동하였다.

참고문헌

『학생운동』(민족운동총서편찬위원회, 민족문화협회, 1981)
『독립운동사』 9(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7)
『청춘만장(靑春挽章)』(1·20동지회, 1973)
집필자
이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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