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노동총연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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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3월 10일 결성된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이 1948년 8월 26일 개편하여 재발족한 전국적인 노동조합 연합체.
이칭
이칭
대한노총
내용 요약

대한노동총연맹은 1946년 3월 10일 결성된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이 1948년 8월 26일 개편하여 재발족한 전국적인 노동조합 연합체이다. 1945년 11월 5일에 좌익계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가 결성되어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1946년에 결성된 우익계인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의 결성과 갈등으로 전평은 소멸되었다. 1948년에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은 대한노동총연맹(대한노총)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대한노총은 노동자의 자주적 조직으로 결성된 것이 아니라 정치적 지원하에 하향식으로 조직되었다. 정부 수립 이후에도 친이승만 단체가 되었으며, 자유당 창당의 기간 단체 역할을 하였다.

목차
정의
1946년 3월 10일 결성된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이 1948년 8월 26일 개편하여 재발족한 전국적인 노동조합 연합체.
변천 및 주요 활동

1945년 11월 5일 좌익계 노동조합 연합체인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약칭 전평)가 조직되어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우익 단체들은 전평을 붕괴시키기 위해 1946년 3월 10일 우익계 노동조합인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을 결성하였고, 찬탁(贊託)을 지지하는 전평과 반탁(反託)을 지지하는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 사이에 치열한 투쟁이 벌어졌고, 미군정과 우익 세력의 탄압으로 전평은 소멸하게 되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노총의 총재가 되고, 전진한 대한노총 위원장이 사회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948년 8월 26·27일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은 대의원대회를 개최하고, 대한노동총연맹(약칭 대한노총)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이 대의원대회에서 위원장 유임 주장과 새 위원장 선출 주장이 대립하였지만, 다수파인 전진한 위원장 유임 지지파가 회의를 강행하였고, 전날 퇴장한 안병성, 김구(金龜), 박경룡 등을 제명하였다. 제명된 반대파는 대한노총 전국혁신위원회를 구성하였다. 1949년 3월에도 집권파와 혁신파의 분쟁이 벌어지자 이승만 대통령이 양 파벌 지도자를 불러서 위원장제를 최고위원제로 변경하도록 하였다.

대한노총은 1950년 3월에 다시 위원장제를 채택하였고, 파벌 대립은 조선방직 쟁의, 자유당 창당을 계기로 자유당 원내파와 자유당 원외파로 분열하였다. 자유당 원내파는 전진한, 김말룡, 임기봉 등이 주도하던 대한노총 조방쟁의대책위원회에 합류하였고, 양 파벌은 독자적인 전국대회를 소집하였다. 대회 소집 권한이 규약상 위원장인 전진한에게 있었지만, 전진한과 이승만의 갈등으로 규약은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한국전쟁이 진행중이고, 정부의 간섭과 조정 노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파벌간의 갈등이 지속되다가 1952년 11월 대한노총 통합대회가 개최되어 이승만의 의지대로 전진한 위원장이 제거되고 조경규 등 3인의 최고위원이 선출되었다. 당시 전진한은 통합대회를 불법 대회라고 비판하였다.

1953년 3월 8일 노동조합법이 공포, 시행되자 법에 따라 각 급 노동조합이 해산, 재조직되었고, 대한노총도 재편성해야만 했다. 1954년에도 대한노총 철도위원장 김주홍과 경전위원장 정대천을 중심으로 대한노동조합연합회 결성 준비를 했고, 대한노총 최고위원 이진수 중심의 세력과 대립하였다. 그 이후에도 거의 매년 대의원대회에서 분열과 갈등이 벌어졌다.

1959년 8월 김기옥 위원장 반대파가 전국노동조합협의회(약칭 전국노협)를 구성하였고, 전국 541개 단위 조합 중 311개 조합, 전체 27만명의 노조원 중 14만명이 대한노총을 탈퇴하고 가입하겠다고 하였다. 1959년 10월 전국노협은 김말룡을 의장으로 선출하고 결성대회를 하였지만 보사부는 합법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1960년 4·19혁명으로 노동계 민주화 요구가 일어났고, 부산 부두노동자들이 김기옥 위원장 집을 급습하고 규탄 시위를 벌였으며, 다른 지방에서도 노조 간부들에 대한 규탄 시위가 벌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5월 9일 대한노총 간부가 총사퇴를 하였고, 전국노협은 170여 개의 단위 노조, 16만명의 조합원을 개편하여 포괄하였다.

사회 전반적인 민주화 열기 속에서 분열된 노동계는 마침내 1960년 11월 25일 대한노총계, 전국노협계, 대한노총을 탈퇴했거나 신규 조직된 노조 등 전국 대의원 725명이 참석하여 대한노총과 전국노협의 통합대회를 개최하고, 통합 조직의 명칭을 한국노동조합총연맹으로 결정했다. 이후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강제 해산후 재결성하게 되었다.

대한노총의 조직과 활동의 주요한 특징은 처음 결성될 때 노동자의 자주적 조직으로 결성된 것이 아니라 정치적 지원하에 하향식으로 조직되었다는 점이다. 정부 수립 이후에도 이승만 대통령과 유착되어 친이승만 단체가 되었으며, 자유당 창당의 기간 단체 역할을 하였다. 이승만은 대한노총을 정치적 필요에 의해 통제, 관리하였고, 그 반대급부로 일부 대한노총 간부가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 대한노총 간부의 국회의원 당선은 당시의 열악한 조합 조직과 사회적 영향력 등을 고려하면 괄목할 만한 것이지만, 집권 세력이 대한노총을 동원하기 위한 수단의 성격을 지녔다. 한편 대한노총 위원장 전진한은 5·10총선거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노동자 이익균점권’을 주장하였고, 이 중 일부 내용은 헌법에 반영되었다. 또한 대한노총은 궐기대회, 헌금 모금 등을 통해 반공주의 의식화 활동을 활발하게 벌였다.

참고문헌

『한국노동운동사』4(송종래, 지식마당, 2004)
『한국노총 50년사』(한국노동조합총연맹, 2002)
『한국노동조합운동사』(한국노동조합총연맹, 1979)
『한국노동조합운동사』상·하(조창화, 한국노동문제연구원, 1978)
『한국노동운동사』(김윤환 외, 청사, 1976)
집필자
류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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