덧무늬토기는 융기문토기(隆起文土器)로 부르기도 한다. 서기전 6000~서기전 4500년경 강원특별자치도와 경상도, 전라도, 제주도를 아우르는 지역에서 제작 · 사용된 신석기시대 조기(早期)의 토기 중 하나이다. 대부분 남해안에 집중 분포하며, 내륙의 강가에서도 드물게 확인된다. 같은 시기 경상북도 울진군에는 죽변리식(竹邊里式)토기, 강원특별자치도에는 오산리식(鰲山里式)토기가 제작 · 사용되었다.
점토 띠를 그릇 표면에 덧붙인 무늬를 융기선문(隆起線文), 점토 띠 위에 손가락이나 도구로 누르거나 찍어서 효과를 더한 무늬를 융기대문(隆起帶文)이라고 한다. 보통 융선문과 융대문으로 줄여서 부른다. 이외에도 콩알 또는 쌀알 모양의 점토덩이를 붙인 두립문(豆粒文)과 기면을 집어 올려서 덧붙인 효과를 낸 유사융기문(類似隆起文)이 덧무늬의 일종으로 여겨지고 있다.
과거 덧무늬토기는 일본이나 러시아 옌하이저우〔沿海州〕 및 중국 송눈평원(松嫩平原) 일대에서 기원했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러나 일본 기원설은 1990년대 이후부터 활발해진 국내의 발굴 조사와 방사성탄소연대측정 결과, 문양의 형식학적인 연구 성과 등에 의해서 부정되었다.
한편, 2007년에 이루어진 양양오산리선사유적의 발굴 조사를 통해 강원도 해안 지역 일대의 특징적인 누름무늬토기, 일명 오산리식토기가 남쪽에서 올라온 늦은 시기의 덧무늬토기보다 연대적으로 앞선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는 동해안 중부 지역의 누름무늬토기가 남해안 지역의 덧무늬토기와 같은 시기에 성행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북방 기원설 역시 철회되었다.
현재는 덧무늬토기의 형식과 유적 분포 양상 등을 통해서 동삼동패총을 중심으로 한 남해안 일대를 기원지로 보고 있다.
덧무늬토기의 편년 연구는 학자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으나 크게 4단계의 변화 과정을 거쳤던 것으로 보고 있다.
1단계는 납작바닥바리모양의 그릇에 손가락으로 찍어 누른 융대문(隆帶文)토기 단계이다. 현재 이 무늬가 가장 오래된 덧무늬토기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2단계는 납작바닥바리모양의 그릇에 도구로 찍거나 누른 융대문과 융선문토기들이다. 덧무늬에 세침선문(細沈線文), 두립문과 같은 다른 무늬가 결합되기도 한다. 직선적인 무늬가 중심이며, 입술 아래와 바닥 위에 수평으로 돌린 점토 띠 사이를 다양한 무늬 패턴으로 채워 넣는 방식이 많다.
3단계는 입술 바로 밑에서 수직 또는 기울여서 점토 띠를 붙이거나 곡선적이고 기하학적인 무늬 등이 나타나는 단계이다. 기존의 납작바닥은 둥근바닥으로 교체되고, 새롭게 독 모양과 단지 모양의 토기들이 만들어진다.
4단계는 퇴화된 덧무늬인 유사융기문이 나타나는 단계이다. 입술 위에 누름무늬와 점토 띠를 수직으로 붙인 무늬, 산 모양 무늬 등이 많아진다.
현재까지 발굴 조사를 통해서 알려진 덧무늬토기 사용인들은 해안을 주 생활 무대로 삼았던 해양 수렵 · 어로민들이었다. 가깝게는 북쪽의 오산리식토기와 죽변리식토기 사용인들, 멀게는 일본 큐슈〔九州〕 지역 사람들과 활발하게 교류하였으며, 부산 가덕도 장항유적과 같은 집단 묘역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덧무늬토기는 과거 한반도 신석기시대 조기의 유일한 토기라는 지위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며, 새롭게 밝혀진 자료들을 통해서 다양한 시각에서의 토기 편년론, 지역성, 물질 교류 및 사회상 등에 관한 연구가 시도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