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미술학교 졸업 후 연수과에 남아 연구를 계속하던 도상봉은 1928년 귀국하였다. 도상봉은 도쿄미술학교에서 근대 일본풍의 아카데미즘 양식을 공부하고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도쿄미술학교 출신들이 활약하고 있던 조선미술전람회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1930년 경신고등보통학교 미술교사를 시작으로 배화여자고등학교, 경기여자중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1948년에는 숙명여자대학교 미술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그러나 1949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 추천작가 및 심사위원이 되면서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의욕적으로 작품제작에만 몰두하기 시작하였고, 1955년부터 대한미술협회 위원장을 역임한 것을 비롯하여, 예술원 회원,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국전 운영위원 등을 역임하면서 미술계 제도권의 중심인물로 활약하였다.
1950년대 이후 정물화와 인물화를 잇달아 제작하면서 자신의 회화세계를 구축하였고, 이 무렵부터 애장하던 조선시대 백자 항아리를 소재로 여러 가지 꽃이 놓인 정물화를 즐겨 그리기 시작했다.
1930년대부터 말년까지 그가 주로 다룬 소재는 고궁의 풍경과 백자 또는 전통적인 기물(器物)이 중심이 된 정물로 압축된다. 이밖에 해안 풍경이나 인물도 등장하기는 하나 극히 예외적이다. 1933년 작인 「성균관 풍경」(국립현대미술관 소장)을 비롯하여 195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의 백자와 라일락을 소재로 다룬 정물은 우리나라 고유의 정감을 화폭에 담으려는 깊은 관조(觀照)를 보여 준다.
전통적인 소재에 대한 애착, 차분히 가라앉은 은은한 색조, 부드러운 필치 등을 통해 섬세하고 온화한 화풍을 이룩하였고, 아카데믹한 자연주의 계열의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대표작으로 「한정(閑靜)」(1949), 「고궁(古宮)」(1953), 「안개꽃」(1971), 「이조백자」(1972)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