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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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버스(화포)나 목판에 식물성 건성유로 녹이고 풀어 쓰는 서양의 그림물감을 사용하여 그린 그림. 오일 페인팅(oil painting) · 유채화.
이칭
이칭
오일 페인팅(oil painting), 유채화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유화는 캔버스(화포)나 목판에 식물성 건성유로 녹이고 풀어 쓰는 서양의 그림물감을 사용하여 그린 그림이다. 오일페인팅 또는 유채화라고도 한다. 15세기 네덜란드의 화가 반 아이크(Van Eyck) 형제가 유화 물감을 기술적으로 개량하면서 유럽 각지에 급속히 전파되었다. 유화 기법은 18세기에 청나라 베이징을 왕래한 박지원 등 서양 문화에 관심을 갖던 실학파 지식인들에 의해서 우리나라에 알려졌다. 1920년대 이후 유화는 전통 회화의 수묵화·채색화와 대비된 새로운 양풍 회화 기법으로 한국에서 뿌리를 내리며 발전과 변화를 거듭하였다.

목차
정의
캔버스(화포)나 목판에 식물성 건성유로 녹이고 풀어 쓰는 서양의 그림물감을 사용하여 그린 그림. 오일 페인팅(oil painting) · 유채화.
연원 및 변천

영어의 오일 페인팅(oil painting)이며 유채화라고도 한다. 기법적으로는 광택, 반광택, 무광택 외에 붓놀림에 따른 화면의 재질감(마티에르) 등이 화가의 의도대로 이루어진다.

기원은 확실하게 밝혀져 있지 않으나, 11∼12세기 이후 독일이탈리아에서 초기 유화 기법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15세기 플랑드르에서 네덜란드의 화가 반 아이크(Van Eyck) 형제가 유화 물감을 기술적으로 개량하여 예술적 수준을 높인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그 뒤로 유럽 각지에 급속히 전파되었으며 그전까지 성행했던 템페라(tempera) 기법을 압도하게 되었다는 것이 일반적 통설이다.

유화 물감의 재료의 성분과 기법이 발전하면서 16세기 이탈리아의 베네치아파 화가들에게서 물감의 두꺼운 질감과 필치의 표현 효과 등 근대 유화와 연결되는 수법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 뒤로 유럽의 유화 기법은 다채롭게 발전을 거듭하였고 유화는 서양 회화의 가장 대표적인 기법이 되었다.

내용

선명한 현실감의 사실주의 서양화법과 아울러 유화 기법이 한국에 처음 알려진 것은 18세기에 청나라 베이징을 왕래한 박지원(朴趾源) 등 서양 문화에 관심을 갖던 실학파 지식인들에 의해서였다. 당시 청나라 양풍 유화가가 그린 실물 유화를 서울로 가져온 사실도 있었음이 기록에 전해진다.

19세기 중엽에는 역시 실학자였던 이규경(李圭景)이 세계 백과사전 성격으로 찬술한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연경(燕京)에서 유래된 소위 양화”가 해설되어 있다. 여기에는 유화의 특이함에 대하여 “그림 위로 약물을 발랐는데, 유리를 씌운 것 같이 영롱하고 선명하며, 색상이 그림 밖으로 튀어나와 보는 사람이 어리둥절하여 실물 여부를 판별하기 어렵게 한다. 그 약물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마 석화채(石花菜) 같은 것을 달여서 칠한 것이 아닌가 한다” 라고 추측하고 있다. 서양 유화 물감의 재료 성분을 정확히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1880년대 이후에는 서양인 선교사와 서양 각국과의 국교 관계 수립에 따른 외교관들이 서울에 상주함에 따라 그들의 실내 공간에서 유화를 볼 수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1899년에는 네덜란드계 미국인 화가 휴버트 보스(Hubert Vos)가 베이징을 거쳐 서울에 와서 고종황제황태자의 전신 초상화를 사실적인 유화로 그린 사실이 크게 화제가 되었다. 그밖에 1900년을 전후해서는 영국 스코틀랜드의 여성화가 콘스턴스 테일러(Constance J. D. Tayler)가 수차 서울에 와서 유화와 수채화로 한국인의 모습과 서울 풍경을 그린 사실도 있었다.

한국인 유화가로서의 선구자는 고희동(高羲東)이었다. 그는 1909년에 대한제국 궁내부 예식원 주사로 재직하다가 양화를 전공하기 위해 일본의 도쿄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로 유학을 떠나 1915년에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돌아와 한국의 첫 유화가가 되었다. 따라서 고희동의 졸업작품인 1915년작 「정자관을 쓴 자화상」을 비롯한 그의 유화 작품들은 우리나라 최초의 유화작품으로 기록된다. 뒤이어 김관호(金觀鎬), 나혜석(羅蕙錫), 이종우(李鍾禹) 등이 역시 일본의 미술 학교 유학을 통해 한국의 양화 개척자들이 되었다.

1920년대 이후에는 더욱 급증하게 된 양화가들과 더불어 유화는 전통 회화의 수묵화 · 채색화와 대비된 새로운 양풍 회화 기법으로 한국에서 뿌리를 내리며 발전과 변화를 거듭하였다.

참고문헌

『세계미술용어사전』(월간미술편, 1992)
「유화의 수용과 전개에 관한 미술사적 검증」(정영목, 『미술사학』8, 1994)
「양화정착의 배경과 그 개척자들」(이구열, 『한국근대미술사의 연구』, 미진사,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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