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온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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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온천
동래온천
인문지리
지명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에 있는 온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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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에 있는 온천.
명칭 유래

전설에 의하면 옛날 백로가 하늘에서 내려와 미역감는 것을 본 인근의 주민이 이를 기이하게 여겨 얕은 샘을 파고 목욕을 한 때부터 온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온정(溫井)은 현(縣)의 북쪽으로 5리 떨어진 곳에 있다. 그 온도는 닭도 익힐 수 있을 정도이며, 병을 지닌 사람이 목욕만 하면 곧 낫는다. 신라 때에 왕이 여러 번 여기에 오고는 하여 돌을 쌓고 네 모퉁이에 동주(銅柱)를 세웠는데 그 구멍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으로 보아 신라 시대부터 온천으로 이용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지금도 남아있는 온정개건비(溫井改建碑)에 의하면 1691년(숙종 17)에 돌로 두 개의 탕을 만들고 지붕을 덮었으며, 1766년(영조 42)에 동래부사 강필리(姜必履)가 낡은 건물을 개축하였다고 한다. 1851년(철종 2)에 목조(木槽)를 석조(石槽)로 바꾸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현황

수질은 알칼리성 식염천(食鹽泉)으로 수소이온농도(pH)는 8.17이다.

수온은 31∼63℃로서 탕내의 수온은 40℃ 정도를 유지한다. 만성류머티즘·관절염·신경통·말초혈액순환장애·요통·근육통·외상후유증 등에 효과가 있다. 근대적인 온천으로서의 개발은 1910년 이후 일본인들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광복 이후, 특히 1960년대에 들어와 탕원(湯源)의 무질서한 개발이 진행됨에 따라 1970년에는 관광지로, 1981년에는 온천지구로 지정, 고시하였다.

그리하여 지금은 탕원 개발의 억제 및 온천 자원의 영구적 활용을 위하여 보호, 관리하고 있다. 온천공은 시소유(市所有) 4호공(孔)을 중심으로 반경 70m 안에 밀집되어 있다. 온천공은 한때 40여 개에 달하였으나 현재는 20개만 남아 있고 온천공의 깊이도 초기의 5m에서 현재 130m에 이르고 있다. 1일 평균 채수량은 겨울철 성수기에 3,000t에 이른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온천으로써 주위에는 관광호텔 등 많은 숙박 업소가 있으며, 인근에 시외버스터미널과 고속버스터미널이 있고 지하철 1호선이 지나고 있어 교통이 매우 편리하다. 온천 주변에는 금정산(金井山)과 금강공원(金剛公園)·금강식물원·범어사(梵魚寺)·부산민속예술관·부산해양자연사박물관·동래온천 노천족탕·이주홍문학관이 있어 온천욕과 더불어 관광도 즐길 수 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부산시가 성장할 때 온천장 일원이 부도심으로 형성되어 지금은 단순히 관광지로서만 아니라 생활 중심지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한편, 온천 자원을 중심으로 촉매작용을 할 수 있는 재개발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여 관광지로서의 고유한 특성은 점점 잃어가고 있다.

참고문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동래구지(東萊區誌)』(부산광역시 동래구, 1995)
『부산(釜山)의 맥(脈)』(최해군, 1990)
『온천지(溫泉誌)』(내무부, 1983)
부산광역시 동래구 문화관광 홈페이지(http://tour.dongnae.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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