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외동 패총 ( )

선사문화
유적
문화재
경상남도 고성군 고성읍 동외리에 있는 삼한시대 대외 교섭의 지역 거점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취락유적.
이칭
이칭
고성패총, 고성 당산패총, 고성 동외동 패총
유적
건립 시기
초기 철기시대
관련 국가
마한|진한|변한
면적
18,916㎡
소재지
경상남도 고성군 고성읍 동외리
시도지정문화재
지정기관
경상남도
종목
경상남도 시도기념물(1974년 12월 28일 지정)
소재지
경상남도 고성군 고성읍 동외리 404-1
내용 요약

동외동패총은 경상남도 고성군 고성읍 동외리에 있는 삼한시대 대외 교섭의 지역 거점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취락유적이다. 1914년 도리이 류조에 의해 처음으로 발견되었으며, 이후 국립중앙박물관과 동아대학교박물관에서 발굴 조사를 실시하여 여러 종류의 유구와 유물들을 발견하였다. 특히 일본에서 반입된 야요이 후기(2-3세기)의 토기 굽다리접시류가 출토된 점이 주목되는데, 이는 동외동패총이 한반도와 일본 사이에 장거리 대외 교류가 있었음을 시사하는 자료이다.

정의
경상남도 고성군 고성읍 동외리에 있는 삼한시대 대외 교섭의 지역 거점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취락유적.
위치와 명칭

동외동패총(東外洞貝塚)은 경상남도 고성군 고성읍의 동쪽에 치우쳐 있는 해발 약 32.5m 정도의 언덕에 조성된 유적이다. 행정구역으로는 경상남도 고성군 고성읍 동외리 404-1에 해당한다. 유적의 맨 꼭대기 부분은 평탄화된 지표면을 이룬다. 멀리서 보아 독립된 언덕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주변의 남산에서 연결되는 언덕의 맨 끄트머리라고 할 수 있다.

경상남도 기념물 제26호에 속하며, 소가야의 중심지인 고성평야 남서쪽에 있는 언덕땅이다. 과거에는 이곳을 가리켜 주1이라 하였고, 음력 섣달 그믐에는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흔히 고성패총, 고성 동외동 패총, 고성 당산패총 등으로 불린다.

조사 경위와 결과

동외동패총이 처음 알려진 것은 일제강점기인 1914년 무렵이다. 당시 도쿄제국대학의 인류학자인 도리이 류조〔鳥居龍藏〕가 사료 조사의 일환으로 동외동패총을 조사했는데, 골각기와 각종 토기의 조각들이 수습되었다. 이후 국립중앙박물관이 1969년과 1970년에 두 차례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으며, 동아대학교박물관도 1974년에 소규모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1차 조사에서는 6개의 층이 확인되었는데 주2과 바닥의 생토층(生土層)을 제외하면 4개층으로 이루어진다. 표토 아래의 1층은 유적 전반에 형성된 층인데, 약 30~40㎝ 두께의 흑갈색 점토질토로 이루어진 것이다. 약간의 골각기와 토기의 조각, 도자기의 조각 등이 섞인 채 발견되었다. 2층은 흑갈색 부식토로 이루어졌으며, 남벽에 20㎝의 조개껍데기의 층이 3층과의 사이에 형성되어 있다. 조개껍데기 속에서는 각종 골각기와 토기의 조각들이 출토되었는데, 대부분 주3주4였다.

3층은 흑색 부식토로 형성된 퇴적층으로 주5주6가 섞여서 출토되고 굽다리접시류와 적색연질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4층은 생토 위에 형성된 퇴적층으로 숯과 재가 깔려 있었고 토기들이 여기저기에 보였는데, 층위별로 시기 차가 정합적인 유물들이 출토되는 것은 아니었다.

2차 조사의 양상도 1차 조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특히 적색연질토기가 많이 출토되었는데, 아래층에서 출토가 많이 되었으며 위층에서는 주로 경질토기류가 많이 출토되었다.

2021년 3월에도 동외동패총에서 대대적인 시굴 조사가 실시되었다. 경상남도 고성군 고성읍 동외리 255-1번지에 해당하는 언덕의 북서쪽 경사가 진 지면이었다. 조사 결과 맨 꼭대기 부분 평탄화된 지표면의 중앙에는 광장을 두고 그 주변으로 의례 주7이 다수 배치된 정황이 드러났는데, 그 아래에 주거지들이 배치되었다. 경사진 지면 아래에서는 조개더미가 확인되었다.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도랑으로 두른 환호(環壕)주8 열이 일부가 드러나 동외동패총이 방어를 의식한 고지성 취락의 일부 요소인 것이 분명해졌다.

출토 유물의 성격

출토된 유물 중 특히 일본에서 반입된 주9 토기 굽다리접시류가 특징적이었다. 이들 주10는 구연부가 길어지고 밖으로 꺾어지는 외반구연(外反口緣)으로 기벽이 고르지 않고 접합부와 구연단 근처가 두꺼운 특징이 있는 형태였다. 이 토기들은 대체로 야요이 후기 즉 2~3세기대의 것으로 평가되며, 고성 동외동 고지성 취락이 삼한 시대 후기 대외 교섭의 지역 거점이었음을 시사하는 자료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발굴 조사에서 출토된 청동제 허리띠걸이 등의 유물들은 금호강 유역과 일본 쓰시마 지역에서도 출토된 바 있어 이 역시도 장거리 대외 교역을 상징하는 유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의의와 평가

동외동패총은 김해패총, 양산패총 등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서기후 시기에 지역을 대표하는 거점 취락의 하나로 평가된다. 패총유적이 아니라, 취락의 부분 요소로서 패총이 곁들여진 유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고성 동외동 취락유적’이라고 명명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참고문헌

단행본

金鍾徹 外, 『固城貝塚發掘報告書』(國立中央博物館, 1992)
金東鎬, 『固城 東外洞貝塚,上老大島』(東亞大博物館, 1984)
주석
주1

토지나 마을의 수호신이 있다고 하여 신성시하는 마을 근처의 산이나 언덕.    우리말샘

주2

토층에서 맨 윗부분에 있는 층.    우리말샘

주3

900℃ 정도의 높은 온도에서 구워 내어 흡수성이 높고 단단한 질그릇.    우리말샘

주4

대기에 노출된 상태에서 산화염으로 구워져 붉은 색깔을 띠고 있는 토기. 원시 시대와 삼국 시대의 유물이다.    우리말샘

주5

진흙으로 만든 그릇. 환원(還元) 상태에서 구운, 치밀하고 단단한 질그릇으로 회색 또는 검은색이다.    우리말샘

주6

실내 가마에서 민무늬 토기보다 약간 높은 900℃ 정도의 고온으로 구워 기와처럼 회색을 띠는 약간 무른 토기.    우리말샘

주7

땅 표면에서 아래로 파 내려간 구멍. 고대인(古代人)들이 주거 양식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우리말샘

주8

말뚝 따위를 죽 잇따라 박아 만든 울타리. 또는 잇따라 박은 말뚝.    우리말샘

주9

일본 선사 시대의 벼농사를 기초로 한, 기원전 200년~기원후 300년의 최초의 문화. 채집 경제 사회에서 생산 경제 사회로 변화한 야요이 시대의 시작은 농업을 중심으로 한 사회 조직이 구축되었다는 점에서 혁명적이다. 청동기를 비롯한 금속기가 도구로 사용되었고, 쌀과 같은 농작물을 비축하여 얻은 부로 계급 사회가 성립되었다.    우리말샘

주10

접시에 높은 굽을 붙인, 고대 식기의 하나. 동남아시아에서는 이른 시기부터 사용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김해ㆍ경주 등지에서 많이 발굴된다.    우리말샘

관련 미디어 (4)
집필자
정인성(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