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직은 군사(軍師)였다. 660년 9월에 신라가 이미 빼앗은 사비성에 백제군사들이 다시 쳐들어와 치열한 싸움이 일어났다.
당시 유수(留守)였던 유인원(劉仁願)이 사비성 내의 백제군사를 격퇴시켰으나 이들은 완전히 돌아가지 않고 사비성의 남쪽 산마루에 올라 네댓 군데 목책을 세우고 진을 치고 모여 틈을 엿보아가며, 성읍을 노략질하니, 이들에게 20여 성이 부응하였다. 10월에 태종 무열왕이 태자와 여러 군사들을 이끌고 이례성(尒禮城)을 공격하여 빼앗으니, 백제의 20여 성이 두려워서 모두 항복하였다. 또한 사비의 남쪽 산마루에 있는 목책을 공격하여 1,500명을 죽였다. 11월에 태종 무열왕이 계탄(雞灘)을 건너 왕흥사잠성(王興寺岑城)을 공격하여 700명을 목 베었다.
11월 22일 왕이 백제에서 돌아와 논공을 하는데 계금당(罽衿幢)의 군졸인 선복(宣服)에게는 급찬(級飡)을, 군사 두질에게는 고간(高干)을 수여하고, 전사한 유사지(儒史知)·미지활(未知活)·보홍이(寶弘伊)·설유(屑儒) 등 네 사람에게는 관작을 차등있게 주어 전공을 치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