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굴 (땅)

땅굴1호
땅굴1호
국방
개념
북한이 기습작전을 수행할 목적으로 휴전선 비무장지대의 지하에 굴착한 남침용 군사통로.
내용 요약

땅굴은 북한이 기습작전을 수행할 목적으로 휴전선 비무장지대의 지하에 굴착한 남침용 군사통로이다. 땅꿀은 1971년 북한 김일성의 땅굴작전 명령에 따른 것으로, 남한과의 전면전 상황에서 신속한 전략지역 점령, 사회혼란 시에는 후방교란을 시행하기 위함으로 추정된다. 제1땅굴은 1974년 비무장지대를 수색하던 육군 제25사단 수색대에 의해 발견되었다. 이후 1975년 철원에서 제2땅굴, 1978년 판문점 부근에서 제3땅굴, 1990년 양구에서 제4땅굴이 발견되었다. 이외 현재까지 약 20여 개의 땅굴이 굴착된 것으로 추정된다.

목차
정의
북한이 기습작전을 수행할 목적으로 휴전선 비무장지대의 지하에 굴착한 남침용 군사통로.
연원 및 변천

북한은 1971년 9월 25일 김일성의 명령에 따라 땅굴작전을 개시하였다. 이른바 ‘9 · 25교시’라 일컬어지는 명령에서 김일성은 “남조선을 해방하기 위한 속전속결 전법을 도입하여 기습전을 감행할 수 있게 하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북한에서는 각 군단별로 땅굴작전이 수행되었으며, 현재까지 약 20여 개의 땅굴이 굴착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북한의 땅굴은 1974년 11월 15일 고랑포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후 1975년 3월 19일 철원에서, 1978년 10월 17일 판문점 부근에서 차례로 발견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북한의 땅굴은 서부와 중서부전선에 집중된 것으로 판단되었다. 그러나 1990년 3월 3일 강원도 양구 북방에서 4번째 땅굴이 발견됨에 따라 우리나라의 모든 전선에 땅굴이 존재한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발견된 땅굴은 순서에 따라 제1, 제2, 제3, 제4땅굴로 명명되었다.

내용
  1. 제1땅굴

고랑포지역에서 발견된 제1땅굴은 1974년 11월 15일 오전 7시 35분에 비무장지대를 수색하던 육군 제25사단 수색대에 의해 발견되었다. 수색임무를 수행하던 중 땅 밑에서 수증기가 올라오는 것을 발견한 수색대는 지표에서 약 46㎝ 아래에 터널이 있음을 발견하고 이를 확인하기 위해 흙을 파다가 군사분계선 북쪽으로부터 약 3분간에 걸쳐 300발 가량의 기관총 사격을 받았다. 이 사격으로 3명이 전사하고 5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 날 밤 주한유엔군사령부는 대변인 성명을 통해서 북한의 정전협정 위반 사실을 확인하고 이를 군사정전위원회에 정식 제기했다고 발표하였다. 이로써 제1땅굴의 전모가 드러났다. 땅굴이 발견된 장소는 경기도 연천군 고랑포 동북쪽 8㎞ 지점으로 군사분계선에서 남쪽으로 약 1.2㎞ 지점이었다. 땅굴은 폭 1m, 높이 1.2m의 조립식 콘크리트 벽과 콘크리트 슬래브 천장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지표에서 250∼450㎝ 깊이로 얕게 파져 있었다. 220V · 60W의 전선, 전등시설이 되어 있었으며, 전체 길이 3.5㎞의 땅굴 안에는 레일이 깔리고 궤도차(軌道車)가 놓여 있었다. 또한 땅굴에는 우회통로와 궤도차를 돌리는 지점 및 취침장소와 배수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유사시 전술능력은 1시간에 1개 연대 이상의 무장병력을 통과시킬 수 있었으며, 궤도차를 이용할 경우 포신(砲身)과 중화기 운반도 가능하였다. 땅굴이 발견된 후 우리 정부는 군사정전위원회를 통하여 북한측에 땅굴현장의 공동조사를 제의하였으나, 북한측은 이를 거부하였다. 이에 땅굴이 발견된 지 5일 후인 11월 20일 한미 공동조사반이 수색에 나섰는데, 북한이 매설한 폭발물에 의하여 국군장교 1명과 미군장교 1명이 순직하고 6명이 부상당하는 참변을 겪기도 하였다. 제1땅굴은 1976년부터 1988년까지 국민안보 교육 목적으로 일반인들에게 공개되다가 1988년 이후 안전문제로 일반인 공개가 중단되었다.

  1. 제2땅굴

제2땅굴은 제1땅굴이 발견된 지 4개월 뒤인 1975년 3월 19일, 철원 동북쪽 13㎞지점에서 발견되었다. 이곳은 군사분계선 남쪽 800m지점이었으며, 항공사진 등을 근거로 시추탐사에 의하여 발견되었다. 땅굴을 조사한 결과 규모는 폭이 2.1m, 높이 2m, 전체 길이 3.5㎞로서 군사분계선 남쪽 1.1㎞지점까지 굴착되어 있었다. 깊이는 지표에서 50∼160m이었으며, 남방한계선 남쪽에 여러 개의 출구를 만들어 유사시에 한꺼번에 출구를 헤치고 나올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지하수가 땅굴 속에 차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약간의 경사를 이루는 기술공법을 쓴 흔적이 역력하고, 많은 병력이 집결할 수 있는 광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군의 실험결과 이 땅굴은 시간당 구보 24,000명, 속보 20,000명, 도보 18,000명의 병력이 통과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정규전에서 땅굴을 통해 시간당 1개 사단 병력을 후방으로 침투시켜 군사적 요충지를 점령함으로써 전방부대를 일거에 고립시켜 전선을 붕괴시킬 수 있고, 비정규전에서는 대남공작원의 침투는 물론 후방교란을 위한 경보병 1개 여단 병력을 은밀하게 후방으로 침투시킬 수 있는 것이었다. 또한 야포와 차량의 통과는 물론, 땅굴의 마무리공사가 이루어졌을 경우에는 전차의 침투도 가능하였다. 제2땅굴 발굴 과정에서 북한군이 설치한 지뢰와 부비트랩에 의해 8명이 전사하였다.

  1. 제3땅굴

제3땅굴은 1978년 10월 17일 판문점에서 4㎞, 군사분계선 남방 435m 지점에서 땅굴수색 시추공사를 하던 중, 한 시추공에 박혀 있던 PVC파이프가 튀어나오고 지하수가 공중으로 12m 가량 솟아오르면서 발견되었다. 땅굴이 발견된 지점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군사정전위원회를 지원하는 유엔군 전진기지로부터 2㎞ 떨어진 곳으로 임진각에서 서북쪽으로 4㎞지점에 위치하였다. 이 땅굴은 임진강 하구에서 판문점을 향하여 남북으로 그어진 군사분계선의 서쪽 1,200m지점으로 추정되는 북한측 지역의 입구에서부터 지하평균 73m의 암석층을 굴착하여 1,635m가량 남쪽으로 내려온 것이었다. 폭 2m, 높이 2m로 제2땅굴과 같은 구조인 아치형이었으며, 전술능력은 1시간에 3만 명의 병력과 야포 등 중화기를 통과시킬 수 있었다.

  1. 제4땅굴

제4땅굴은 1990년 3월 3일 강원도 양구 북동쪽 26㎞지점에서 발견되었다. 폭 1.7m, 높이 1.7m, 지하 145m 깊이에 길이는 약 2㎞에 달하는 암석층 굴진 구조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땅굴은 동부전선에서 발견된 최초의 땅굴로 북한이 전 전선에 걸쳐 남침용 땅굴을 굴착하였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땅굴과 관련하여 숨겨진 북한의 전략적 기도는 첫째, 전면전을 전개할 때 대량병력의 신속한 이동으로 중요 전략지역을 점령하고, 둘째, 사회혼란이나 무장폭동이 일어났을 경우 게릴라부대인 ‘특수8군단’과 ‘경보병부대’를 침투시켜 후방을 교란시키려는 데 있다고 추정된다.

참고문헌

『대비정규전사』2(국방군사연구소, 1988)
『북괴의 대남도발사』(내외통신, 1980)
『북괴만행사십년』(한국반공교육연구원, 1985)
『북괴도발30년』(북한연구소, 1978)
관련 미디어 (3)
집필자
박동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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