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목천(木川). 본명은 마상규(馬湘圭), 아명은 창록(昌祿), 호는 해송(海松). 경기도 개성 출신. 아버지는 마응휘(馬應輝)이며, 7남매 중 4남이다.
1919년 개성제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개성간이상업학교를 거쳐 서울의 중앙고등보통학교를 다니다 중퇴하고 보성고등보통학교로 옮겼으나 1920년 동맹휴학사건으로 퇴학하였다.
1921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대학 예술과에서 수학, 졸업하자 곧 일본의 종합교양지 『문예춘추(文藝春秋)』의 초대 편집장을 거쳐 1930년에는 『모던니혼』지를 발행하다가 광복 후 귀국, 1945년 송도학술연구회 위원장, 1950년 국방부 한국문화연구소장을 역임하였다. 6·25중에는 국방부정훈국 편집실 고문, 승리일보사 고문을 지내면서 평안북도 영변까지 종군하였다. 그 뒤 마을문고 보급회장, 대한소년단 이사 등을 지냈고, 1962년에는 서울특별시 시민헌장을 기초하기도 하였다.
그는 중앙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에 잡지 『여광(麗光)』의 동인이 되었고, 일본 유학 중에는 ‘일본유학생동우회극단’의 일원으로 국내 각지 순회공연을 하였으며, 1922년에는 문학클럽 ‘녹파회(綠波會)’를 공진항(孔鎭恒)·김영보(金泳俌)·고한승(高漢承)·진장섭(秦長燮) 등과 조직함으로써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하였다.
1923년에는 『새별』지에 최초의 탐미적 창작동화 「바위나리와 아기별」·「어머님의 선물」·「복남이와 네 동무」 등을 발표하는 한편, ‘송도소녀 가극단’을 도와 지방 순회를 하면서 자작동화를 구연하였다. 1924년 ‘색동회’에 가입하여 어린이를 위한 문화 활동을 계속하면서 『어린이』지를 통하여 많은 동화를 발표하였다. 동화 창작은 1935년까지 꾸준히 계속하였다.
풍자적인 「토끼와 원숭이」 등의 중편과 많은 단편을 발표하였고, 광복 후에는 장편동화에 주력하여 「앙그리께」(1954)·「멍멍 나그네」(1959)·「모래알 고금」(1957∼1961) 등을 발표하였다. 한편, 아동문화운동에도 크게 관심을 가져 천주교에 귀의하기 전해인 1957년에는 「대한민국 어린이헌장」을 기초하여 발표하였고, 또한 1958년 최초의 ‘어린이헌장비’를 대구에 건립하는 데 진력하였다.
저서로는 위에서 든 것 외에 소설 「홍길동」(1927)과 동화집 『해송동화집』(1934)·『토끼와 원숭이』(1947)·『떡배 단배』(1953)·『모래알 고금』(1958)·『멍멍 나그네』(1961)·『마해송아동문학독본』(1962)·『비둘기가 돌아오면』(1962), 그리고 소설 「아름다운 새벽」(1961) 등이 있고, 수필집 『편편상(片片想)』·『속편편상』·『전진(戰塵)과 인생』·『씩씩한 사람들』·『요설록(饒舌錄)』·『오후의 좌석』(1962) 등이 있다.
1959년에 「모래알 고금」으로 제6회자유문학상을, 1964년에는 「떡배 단배」로 제1회한국문학상을 각각 수상하였고, 같은 해에 ‘고마우신 선생님’으로 추대되었다. 1965년에는 그의 회갑을 기념하는 아동문학집 『마해송할아버지』가 나왔고, 1967년 1월에는 새싹회에 의하여 ‘해송동화상’이 제정되었으나 2회로 중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