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인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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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1만명 내외의 유생(儒生)들이 연명해 올린 집단적인 소(疏).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만인소는 조선시대에 1만 명 내외의 유생들이 연명해 올린 집단적인 소(疏)이다. 주로 성균관 유생들이 주도하여 집단상소를 올렸는데 16세기 중엽 이후 지방 유생들이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18세기말 이후에 총 7차례 작성되었다. 최초의 만인소는 1792년에 영남 유생이 사도세자의 신원(伸寃)을 위해 올린 상소이다. 개항 이후 척사운동의 일환으로 영남 유생들이 개화정책을 반대하며 만인소를 올렸다. 1855년 장헌세자 추존 만인소와 1884년 의제개혁 반대 만인소의 원문이 보관되어 있으며, 2018년 유네스코(UNESCO) 아시아태평양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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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시대에 1만명 내외의 유생(儒生)들이 연명해 올린 집단적인 소(疏).
내용

조선왕조는 왕조 국가이지만 조정의 시책이 잘못되었을 경우 유생들이 개별적으로 또는 집단적으로 자신들의 의견과 주장을 내세울 수 있었다. 유생들의 집단적인 상소는 16세기 전반까지는 성균관 · 4학유생(四學儒生)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러나 16세기 중엽 이후 지방 사족(士族)들의 세력 증대에 따라 유생 집단이 형성되면서 지방 유생들에 의해서도 주도되기 시작하였다. 지방 유생들의 집단 상소는 처음에는 수백 인이 연명하는 정도의 규모였다. 그러나 후대로 내려가면서 1,000명대를 능가하는 규모로 더욱 커져갔다. 그리하여 18세기 말 이후에는 1만인 내외의 유생들이 연명한 대규모의 집단 상소도 간혹 나오게 되는데, 이를 일컬어 흔히 만인소라 하게 되었다.

만인소는 총 7차례가 있었으며, 최초의 명실상부한 만인소는 1792년(정조 16)에 나왔다. 당시 유학(幼學) 이우(李㙖)를 소두(疏頭)로 한 영남 유생 1만 57인(2차 상소 때는 1만 368인으로 늘어남.)이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신원(伸寃)을 위해 연명 상소하였다. 그 뒤 1823년(순조 23)에는 김희용(金熙鏞)을 위시한 경기 · 호서 · 호남 · 영남 · 해서 · 관동 지방의 유생 9,996인이 서얼(庶孽)도 차별 없이 임용할 것을 요청하는 소를 올렸다. 1855년(철종 6)에는 경상도 유생 이휘병(李彙炳) 등 1만 96명이 장헌세자(莊獻世子 : 사도세자를 정조 때 개칭한 명칭) 추존(追尊)을 요청하는 소를 올렸다.

만인소로 또 하나 유명한 것은 개항 뒤 조정의 개화 정책에 반대해온 척사론자(斥邪論者)들이 1881년(고종 18)에 척사운동의 일환으로 올린 연명소이다. 전년도 여름에 제2차 수신사(修信使) 김홍집(金弘集)이 일본에 다녀온 뒤 주일청국공사관 참찬관 황준헌(黃遵憲)이 지은 『조선책략(朝鮮策略)』을 왕에게 진헌하였다. 그 외 1868년(고종 5), 1875년(고종 12), 1884년(고종 21)에도 만인소가 있었다. 그것은 조선의 외교 정책이 ‘친청국(親淸國)’ · ‘결일본(結日本)’ · ‘연미국(聯美國)’해 러시아의 남하 정책에 대비해야 한다는 내용을 수록한 것이었다. 조정에서는 이에 관심을 가지고 개화자강(開化自强)의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자, 안동 · 상주 등 영남의 유생들은 전통적인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을 주장하면서 조정의 개화 정책에 대한 반대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이황(李滉)의 후손인 이만손(李晩孫)을 소두로 하는 만인소를 올려 조정의 개화 정책을 비난하고 그 추진자들을 규탄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영남만인소이다.

그 내용을 보면 선왕대에는 사교(邪敎)를 엄금했고, 또 병인 · 신미 양요 때에도 쇄국정책을 펴면서 오랑캐를 강력하게 토벌했는데 오늘에 와서는 이들을 영접하려고 하는 세태를 개탄하였다. 이어 일본의 간교함을 지적하면서 그들과의 결탁은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간파하였다. 또한 미지의 미국을 끌어 들여 그들의 꼬임과 요구에 말려 감당하기 어려운 국면에 처하게 될 것임도 경고하였다. 그리고 러시아에 대해서는 쓸데없이 그들을 자극해 침범을 자초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황준헌이 주장한 외교 정책은 매우 위험한 것임을 지적해 비판하였다.

이처럼 영남만인소에서 구미 여러 나라와 일본의 야심을 논파하고 민족 정의로 부당성을 제시했기 때문에 황준헌의 외교 정책은 수용되지 못하였다. 이 중 1855년 장헌세자 추존 만인소와 1884년 의제개혁 반대 만인소의 원문이 각각 안동 도산서원경주 옥산서원에 보관되어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으며, 2018년 '만인의 청원, 만인소'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UNESCO) 아시아태평양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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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실록』
『철종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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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천야록(梅泉野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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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철학사』(유명종, 한명문화사, 1969)
『한말의 민족사상』(홍순창, 탐구당, 1975)
『한국사』 16·19(국사편찬위원회, 1975·1976)
「정조조의 영남만인소」(이수건, 『교남사학』 창간호, 1985)
「조선후기 영남유소에 대하여」(이수건, 『두계이병도구순기념한국사학논총』,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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