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1년(고종 18)의 만인소(萬人疏) 소두(疏頭). 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가술(家述), 호는 돈와(遯窩). 경상북도 예안 출신. 이황(李滉)의 후손이며, 이휘병(李彙炳)의 아들이다.
1880년 수신사(修信使) 김홍집(金弘集)이 가져온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朝鮮策略)』을 국왕이 받아들이고 대신들이 이에 동조해, 조야(朝野)의 비판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개혁정책이 추진되고 외국과의 교섭이 빈번해졌다.
이 때 이만손은 『조선책략』을 읽고 중국·일본·미국과 연합하여 남하하는 러시아 세력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의 불합리성을 지적하고, 황준헌이 중국인이지만 오히려 일본의 세객(說客)인 것으로 규정하는 내용의 소를 올렸다.
이만손의 이러한 견해에 동조하는 전참판 강진규(姜晉奎)·이만운(李晩運), 전승지 이만유(李晩由) 등 상주·안동 지방 유생들이 연서하여 1881년 2월 고종에게 올린 것이 이른바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이다. 이는 그 이후 전개된 전국적인 유생들의 반대운동의 선구가 되었다.
당시 조야의 주목 대상이 된 이 상소문의 표면적인 이유는 김홍집의 탄핵이었으나 실은 정부에 대한 공격이었으므로 관리들의 경계가 만만치 않았다. 또한, 민문 척족(閔門戚族)의 중심 인물인 민태호(閔台鎬)에게 주의를 받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3월 재차 상소를 기도하자 조정을 비방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전라도 강진의 신지도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온건개화정책을 추진하던 민씨정권에 대한 위정척사운동이 성숙되고, 민씨정권의 실정이 누적되어 임오군란이 일어나 척사를 표방하는 대원군이 재집권하자 풀려나왔다. 만인소는 조선 말기 위정척사사상에 근거를 둔 민족 자존 의식을 역설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