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화회’로 불리기도 하나, 일본 전역에 설치된 협화회 및 그 상위 본부조직인 ‘중앙협화회’와 구별하기 위해 정식 명칭인 ‘만주제국협화회’로 불렀다.
괴뢰만주국의 배후 실권자인 관동군(關東軍)의 구상과 지도에 의해 1932년 7월 25일, 만주국 국무원 회의실에서 발회식을 가졌다.
강령은 ① 건국정신의 현양, ② 민족협화의 실현, ③ 국민생활 향상, ④ 선덕달정(宣德達情)의 철저, ⑤ 국민동원 완성의 5항목으로서 “건국 이상의 실현과 도의세계의 창건을 기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강령에 입각, 만주제국협화회는 정신공작·협화공작·후생공작·선덕달정공작·조직공작·흥아공작(興亞工作)의 6개 항목을 실천방책으로 삼았다.
첫째, 정신공작은 일만불가분(日滿不可分)의 이해와 건국정신을 철저하게 따르기 위한 사상통일이 요체이다. 둘째, 협화공작은 만주국 전체 국민의 핵심적 지도체로서 소위 5족협화(五族協和)를 달성한다는 것이다. 셋째, 후생공작은 만주국 건국 이상의 경제적·사회적 실체화를 통한 민생 안정과 향상이다.
넷째, 선덕달정공작은 하의상달·상의하달에 의한 국민의 열복(悅服)이다. 다섯째, 조직공작은 동원·조직·훈련으로써 전국민을 조직화하는 것이다. 여섯째, 흥아공작은 만주국의 건국정신을 동아에 확충, 아시아의 각 국민을 각성, 흥기시키는 것이다.
즉, 일만일체(日滿一體)·선만일여(鮮滿一如) 달성으로 일제의 동아블럭을 완성할 수 있는 기초를 닦아 만주의 전체 주민을 사상적·정치적·사회적으로 통일, 조직화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 회는 제1차조직인 본부 중앙조직 밑에 집행기관과 결의기관을 두었다. 본부 중앙조직은 명예총재·명예고문·회장·명예이사·이사장·이사로 구성되며, 명예총재에 만주국집정(執政:황제), 명예고문에 관동군 사령관을 추대하였다. 회장은 이 회를 통괄하고 대표하는데, 만주국 국무총리가 추대하는 형식이었다.
창설 당시 명예이사는 관동군 참모장 하시모토(橋本虎之助), 만주국 국무원 총무장관 고마이(駒井德三), 관동군 참모 이다가키(板坦征四郞)의 세 일본인을 임명하였다. 이사장은 장연경(張燕卿), 이사는 만주국 요인과 실권자 등 33명과 집정이 추천하는 약간 명으로, 관동군 대위 출신 윤상필(尹相弼)이 유일한 조선인으로 참가하였다.
이사장과 이사는 중앙사무국 위원과 함께 이사회를 구성함으로써 이 회의 예산·결산과 최고방침을 결정하였다. 본부 중앙조직 아래 집행기관은 의결기관과 마찬가지로 정부조직에 대응하여 구성되었다.
즉, 국무원→성공서(省公署)→현(縣)·기(旗)·시(市) 공서→가(街)·촌(村) 공서로 되는 정부의 관공서 조직에 대응해, 중앙사무국→지방사무→판사처(辦事處)→분회(分會)로 되는 집행기관과, 전국연합협의회→성(省)연합협의회→현·기·시연합협의회로 되는 의결기관으로 구성되었다.
중앙사무국은 중앙사무국 위원으로 조직되며, 이사회의 결정사항 등을 집행하였다. 전국연합협의회는 국회에 대비되는 기구로서 지방분회가 선출하는 전국연합협의회 협의원으로 조직되며, 이사회 또는 중앙 사무국의 자문사항과 지방협화회의 제안사항을 의결하였다.
이리하여 이 회는 만주국 유일의 정치적 주민조직(정당은 아님)으로서, 관동군 및 그 조종을 받는 만주국의 정책 실현에 대종적인 구실을 하였다. 1940년 6월 현재 조직원은 167만 853명으로, 만주인 141만 8,801명, 일본인 14만 9,369명, 조선인 8만 1,650명, 몽고인 9,924명, 러시아인 3,622명, 기타 7,487명 등이었다.
조선인은 윤상필이 중앙본부 이사로 참가한 외에, 박팔양(朴八陽)이 본부 홍보과, 백석(白石)이 경제부에 재직하였고, 고봉기(高鳳岐)·김응두(金應斗)·이선근(李瑄根) 외 다수가 전국연합협의회 협의원으로 활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