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해암(望海庵)은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절에서 전하는 연혁에 따르면 신라 문무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하는데 유물이나 문헌으로 고증된 사항은 아니다. 기록에 따르면 1407년(태종 7) 한양의 백호(白虎)에 해당하는 관악산의 산천기맥(山川氣脈)을 누르기 위해 왕명으로 몇몇 사찰을 중창할 때 함께 중건하였다고 한다.
1803년(순조 3) 홍대비(洪大妃)의 시주로 중창하였고 1863년(철종 14) 대연화상이 중수하였다. 1950년 6 · 25 전쟁으로 소실되었는데, 이후 현대식으로 신축하였다. 용화전 내에 조선 초기의 석불입상이 봉안된 점을 고려하면 망해암은 조선 전기에 건축된 사찰로 추정된다. 경내에는 근래에 건립한 법당과 범종루, 요사 등이 있다. 용화전에는 화강암으로 조성된 석불입상과 약사불이 봉안되어 있다.
망해암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조선 세종 때 조세를 운반하던 배가 월미도 부근을 지날 때 심한 풍랑으로 인하여 전복될 지경에 이르렀다. 선원들이 당황한 채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뱃머리에서 어떤 승려가 나타나 그들을 진정시키고 인도해 무사히 위기를 넘겼다. 풍랑이 잠잠해진 뒤, 한 선원이 고마운 마음에 승려가 사는 절이 어디인가를 묻자 관악산 망해암에 있다고 대답한 뒤 홀연히 사라졌다.
선원들이 한양에 도착하여 은혜를 갚기 위하여 망해암을 찾았으나 승려는 없고 그와 용모가 아주 흡사한 불상만이 법당에 봉안되어 있었다. 그들은 깨달은 바가 있어 나라에 상소를 올려 이 사실을 알렸는데, 이를 가상히 여긴 세종은 매년 공양미 한 섬씩을 불전에 올리도록 하였고 이러한 공양은 조선 후기에까지 지속되었다고 한다.
용화전에 봉안된 안양 망해암 석불입상은 머리 위에 원형 보개를 착용하였으며 무릎 아랫부분은 마루 밑에 묻혀있다. 석불입상의 보개 하단에는 ‘성화십오년사월일조성(成化十五年四月日造成)’이라는 명문이 음각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서 1479년(성종 10)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머리와 보개는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으며 상호와 신체부는 흰색의 안료로 도색되어 있다. 머리는 마모되었지만 나발을 갖추고 있다. 머리 위에는 큼직한 육계가 있고 육계 상면에는 원형의 두터운 보개가 있다. 머리의 정면 중앙에는 계주가 표현되어 있다. 상호는 방형에 가까운데 이마에는 금속재로 백호를 표현하였다.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 양 눈은 반개하여 아래를 보고 있다. 코와 입은 두툼하게 조각하였다. 양 귀는 크게 만들었으며 귓불을 길게 내려뜨리고 있다.
법의는 통견으로 두껍게 처리하여 신체의 곡선미를 볼 수 없다. 불상의 후면은 평면으로 다듬은 후 아무런 조식을 하지 않았다. 왼손은 가슴 앞으로 올려 엄지와 검지를 맞대고 내장하였으며, 오른손은 오른쪽 다리로 내려 외장하였다. 이 석불입상은 조선 전기 석조불상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