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미도(月尾島)는 원래 주1였으나, 1920년대에 돌 축대를 통해 육지와 연결되어 현재는 섬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월미도의 역사와 지명이 인천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크다고 할 수 있다.
월미도 명칭의 유래는 월미도(月尾島), 어을미도(漁乙未島 · 於乙味島), 어미도(於味島), 얼미도(突尾島) · 얼도(突島) · 월성(月星) 등이 있다. 한때 제물도(濟物島)라고 부른 적도 있다. ‘얼’이라는 글자는 ‘얼다’ 곧 ‘사랑하다’, ‘어르다’의 의미이고, ‘미’는 ‘물[水]’를 의미하한다. 결국 월미도는 ‘물이 섞이는[어르는 · 휘감아 도는] 섬’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주2에는 ‘Rose Island’로 외국에 알려지기도 하였다.
육지가 되기 전의 이 섬의 둘레는 1㎞이고, 육지와의 거리는 1㎞인 아담한 섬이었으며, 남쪽에는 소월미도가 있었다. 소월미도와 함께 인천내항의 북서쪽 방파제 역할을 하였다. 섬 중앙에는 월미산(해발 108m)이 있다. 월미산은 군부대가 주둔하여 2001년 이전까지 출입이 제한된 곳이었다. 2001년 이후에는 자연 생태계가 잘 보존된 생태 공원으로 개방되었다. 인천광역시 지역의 기후 자료(1991년~2020년)에 따르면, 평균 기온은 12.5℃, 1월 평균 기온은 -1.5℃, 8월 평균 기온은 25.6℃이고, 연강수량은 1,207.4㎜이다.
월미도는 본래 인천 도호부 관할이었으나 1653년(효종 4) 영종진이 설치된 후 그에 편입되었다. 월미도에는 조선 후기 임금의 임시 거처인 행궁이 설치되었고, 행궁은 존속 주3 내내 영종진 관할이었다. 월미도 행궁은 대체로 18세기 전반까지는 유지되었다.
총독 주4가 시작되면서 월미도를 풍치지구(風致地區)로 지정하고 월미도 중턱에 순환 도로를 만들었다. 주5은 목욕탕을 개설하고 일본 요정인 용궁각(龍宮閣), 호텔, 동물원, 하계 야영 캠프촌 등을 만들어 임해 유원지로서 명소가 되었다.
1922년에 석축제도를 만들어 월미도는 육지에 속하게 되어 섬으로서의 역할이 끝났다. 그리고 1920년대 후반부터 15년간 전성기를 누리던 월미도는 태평양 주6에서 일본이 패망하고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시설이 초토화되었다. 월미도는 인천 개항을 전후하여 외세의 주7이 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한때 군사 주8로, 6·25 때에는 인천상륙작전의 전초 주9로, 그 뒤 미군용지로 이용된 일도 있었다.
2001년 6월 26일 문화관광부가 월미관광특구 지정의 일환으로 월미도 문화의 거리 안의 친수 주10 확장과 월미산을 개방하기로 하였다.
1980년 이후 관광지가 조성되어 각종 위락 주11과 해수욕장 · 호텔이 갖추어져 있다. 1989년부터 꾸며진 문화의 거리에서 문화 행사인 월미축제가 열려 시민들의 문화 의식을 높이고 지방 예술 문화 주12에 기여하고 있다. 문화의 거리는 인근의 놀이공원과 함께 각광을 받는 곳이다.
2001년 6월 월미도 문화의 거리가 조성되었는데, 그 길이는 770m, 폭은 20m이다. 이 거리의 끝지점에는 바다로 난 길이 있다. 문화의 거리를 사이에 두고 오른쪽으로는 바닷가, 왼쪽으로는 카페와 횟집이 즐비하다. 이 곳에서 매년 ‘월미 관광 문화 축제’가 열리고 있다. 월미 관광 문화 축제 중에 풍어제, 인천 근해 갯가 노래, 뱃노래, 은율탈춤, 국악제 등 전통적인 춤과 노래를 즐길 수 있다.
월미도에는 국내 최장 도심형 관광 주13이 있다. 월미 바다 주14로 불리는 이 관광 모노레일은 총 운행 거리가 6.1㎞이며, 평균 시속 9㎞의 속도로 월미도를 1바퀴를 도는데 걸리는 시간은 약 42분 정도이다. 월미 바다 열차의 궤도는 지상으로부터 7m에서 최고 18m 높이이며, 월미도 경관 및 인천 내항을 볼 수 있으며 멀리 서해와 인천대교까지 조망할 수 있다.
월미도와 소월미도 사이에는 인천항 주15이 위치하고 있다. 인천항 갑문은 인천 앞바다의 큰 조수 간만 주16를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갑문을 통해 인천 내항으로의 입항이 가능하다. 갑문 인근의 갑문 홍보관에서는 인천항 갑문의 전경과 선박들이 갑문을 통항하는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