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부터 나타나며, 조선 후기, 특히 19세기 후반에 집중적으로 발생한 강도집단 혹은 떼강도를 말한다. 명화적은 화적(火賊)이라 불려지기도 했는데, 이러한 명칭은 그들이 약탈할 때에 주로 횃불을 들고 다녔다는 점, 약탈 방법이 대체로 불을 가지고 공격했다는 점과 관련이 있다.
명화적이 일반 절도나 강도와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은 단순 강도가 4, 5인 이하의 오합지졸(烏合之卒)의 모임인 반면, 명화적은 수십 명이 대오(隊伍)를 조직하고, 반드시 수괴(首魁)인 우두머리가 있으며, 부유한 가정을 선택해 공격했다는 점이다.
정약용(丁若鏞)도 절도와 강도·명화적을 다음과 같이 구분했다. “절도는 밤중에 창문을 뚫고 들어와 함과 고리짝을 열고 옷주머니나 상자를 뒤져서 옷이나 대야를 훔치거나, 혹은 가마솥을 떼어 가지고 달아나는 자, 강도는 칼을 품고 몽둥이를 소매 속에 감추고 길에서 사람을 기다려 우마(牛馬)나 전폐(錢幣)를 빼앗고 칼로 찔러서 그 입을 막는 자, 명화적은 뛰어난 말을 타고 수놓은 안장에 올라앉아 뒤쫓는 자가 수십 인이요, 횃불과 창검을 늘어 세우고 부자집을 택해 안채에 들어가서 주인을 결박한 다음 금고를 털고 곡식창고를 불지르며, 거듭 협박해 감히 발설하지 못하도록 하는 자”라는 것이다.
조선 전기부터 강도집단이 나타났지만 대체로 초적(草賊)·토적(土賊) 등으로 지칭되었다. 또 조선 전기의 강도집단은 주로 백정(白丁)·재인(才人) 등 특정 신분의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활동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임꺽정의 무리도 이러한 신분적 특성이 강했고, 1741년(영조 17)에도 후서강단(後西江團), 폐사군단(廢四郡團), 채단(彩團), 유단(流團) 등의 특정 지역이나 계층을 나타내는 집단의 이름을 가진 도적집단이 나타나기도 했다.
명화적의 활동은『세종실록』의 기사 내용을 통해 조선 전기부터 존재했지만 민란의 시대인 19세기에 집중적으로 발생하였다. 명화적 활동은 주로 유민(流民)에서 발생한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19세기 중반 무렵까지만 해도 시기적으로는 추동기(秋冬期), 지역적으로는 기호지방(畿湖地方)에 집중되는 일시적·국지적 양상을 보였다.
그것은 기호지방이 여타지방에 비해 가장 훌륭한 구휼제도를 구비하고 있고, 상공업면에서도 호구책을 구할 기회가 많은 서울을 끼고 있어 유민들이 가장 많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왕과 왕의 종친을 비롯한 고급 관료들이 집중되어 있었고, 이에 따라 조세를 위시한 봉건지대 등 잉여생산물의 많은 부분이 몰려들었으며, 상업활동도 자연 활발해 명화적 집단이 목표로 하는 재화(財貨)가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862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명화적의 활동은 장기화·항상화·광역화·전국화한 양상을 띠게 된다. 남으로는 영호남에서 북으로는 관서·북에 이르는 전국적 양상을 띠었다.
적게는 10여 명으로부터 많게는 100여 명이 이합집산(離合集散)하는 가운데 한 집단이 9개월 내지 2년이라는 장기간에 걸쳐 활동하였다. 이 단계에 이르면 육지의 명화적 뿐만 아니라, 해양을 무대로 하는 해적이나 포구(浦口) 등을 활동 무대로 삼는 수적(水賊)의 활동도 빈발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무엇보다 임술민란이 대변해주듯이 지배계급의 수탈이 격심해진데서 연유하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농업생산력의 진전에 따라 농민층의 경영분화가 심화했음을 시사해주기도 한다.
이전까지만 해도 대다수의 빈농들은 영세한 소작인이나 협호(挾戶)·고공(雇工) 등의 형태로 농사철에는 농업에 투입될 수 있었다.
때문에 명화적의 활동양상도 수탈이 집중되는 가을에서부터 겨울에 걸처 유민화해 그 가운데 일부가 명화적 활동을 했더라도 농사철에는 다시 농업에 종사하는 반농반명화적(半農半明火賊)의 성격을 보여 주였다.
그러나 생산력의 향상에 따라 필요노동력이 절감되면서 농업경영상의 계층분화가 본격화해 농업으로부터 완전히 축축될 수 밖에 없는 빈농층이 나왔다. 이러한 사정들이 곧 명화적 활동의 장기화·항상화·전국화를 초래한 것으로 보인다.
명화적 활동이 장기화·광역화하고, 그에 따라 도로가 끊어지고 장시(場市)가 텅 비어 폐허가 될 지경에 이르자 정부에서도 대처방안을 모색하게 된다.
매년 가을에서부터 겨울에 걸쳐 거의 항례적으로 포도신칙(捕盜申飭 : 도적을 잡을 것을 타일러 경계하게 함.)을 내렸지만, 1878년 6월에 내린 포도신칙에서는 처음으로 포군(砲軍)을 조발(調發)해 명화적에 대처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1883년 1월 25일에는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강화하는 방안이 마련되어 1885년에 절목으로 확정하기도 했다.
오가(五家)를 1통(統)으로 하여 통수(統首) 1인을 두고, 5통마다 동장을 두어 이들로써 작통을 감독케 할 것, 이사를 가거나 들어오는 사람은 반상(班常)·노복(奴僕)·고용(雇傭)을 막론하고 보고할 것, 여각(旅閣) 주인은 생산활동을 하지 않고 놀고먹는 자들의 유숙을 금할 것, 명화적의 약탈이 있을 때는 정(鉦)을 울리고 요로(要路)를 막아 적도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할 것 등이 중심내용이다.
오가작통사목의 강화는 포교(捕校)들 만으로는 도저히 대처할 수 없을 만큼 명화적 집단의 세력이 강력했음을 방증한다. 그리고 촌락공동체를 규제해 백미황건(白眉黃巾 : 머리를 박박 깎아 황색 두건을 두른 도적집단)과 같은 반란세력으로 규정한 명화적 집단과 촌락공동체에 남아있던 농민과의 연결을 막으려는 방안이었다.
명화적의 활동은 더욱 치성해 갔으며, 활동의 장기화·광역화 현상과 더불어 조직도 더욱 체계를 갖추어 갔다.
몰락 양반계열의 지식층이 중심이 된 두목이나 모사(謀士)는 지도부를 장악해 도록(都錄 : 성명이나 물건의 이름들을 기록한 총목록)이나 부기(簿記) 등 중요한 문건을 관장해 명령계통을 수립하였다. 장물처리책이나 중간상인의 존재 등 횡적인 기능분담도 일정하게 이루어졌다.
또한 집단간의 연계·통합이 이루어지는 등 고립분산성을 극복해 나가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명화적에 대해 추위와 빈곤에 쫓긴 ‘강요된 범죄’로 이해하는 한편, 진짜 강도의 무리들은 대감·감사·수령·토호 그리고 이서배에 이르는 전지배층들이라고 항변했던 의식상의 변화와 함께 1885년 이후에 활빈당(活貧黨)이라는 ‘의적’이 나타나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명화적의 주요 구성원은 행상(行商), 승려(僧侶), 걸인, 농민, 품팔이, 비부(婢夫) 등으로서, 이들은 대부분이 농촌에서 축출된 빈농출신이었다. 약탈대상은 주로 봉건지주, 관료, 여각·객주, 그리고 지방관아에서 중앙으로 보내는 상납전(上納錢) 등이며 나아가 관아를 직접 공격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물론 이러한 약탈대상에 명화적이 목적으로 하는 재화가 풍부했다는 사실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러한 현상의 기저에는 19세기의 조선 사회가 잉태하고 있던 첨예한 모순관계가 깔려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명화적 집단 자체가 19세기 조선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서 배태된 산물인 만큼 그들의 활동내용 또한 그들을 배태한 객관적 조건에 의해 일정하게 규정될 수 밖에 없다.
명화적 집단의 구성원들은 대부분이 원래는 빈농이었으며, 이들이 몰락·궁핍화해 토지로부터 유리·축출될 수 밖에 없던 가장 기본적이고 직접적인 원인은 지주 및 국가권력의 수탈이었다.
따라서 지주-관료 및 국가의 상납전에 대한 약탈은 명화적 집단과 이들 사이에 놓여있는 첨예한 대립관계가 표출된 현상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장시에 대한 약탈은 장시를 통해 일정하게 성장하던 소상품생산자의 활동기반을 저해했다는 측면도 있었다.
그러나 주로 궁방이나, 지주-관료들이 유통권을 장악하는 교두보가 되고, 또 지방·중앙관아나 궁방과 결탁한 수세청부인으로서 일반 백성들의 수탈의 첨병노릇을 하던 여각·객주를 공격함으로써 이들 봉건지배계급들에게 일정한 경제적 타격을 주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19세기 명화적의 활동의 기저에는 농촌에서 축출된 빈농들이 전개한 지배층에 대한 저항운동으로서의 의미가 깔려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