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권 4책. 목판본. 1790년(정조 14)에 완간되었다. 『무예통지』·『무예도보』·『무예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후 군사의 무예훈련을 위한 필요성에 따라 1598년(선조 31) 한교(韓嶠)의 『무예제보(武藝諸譜)』, 1759년(영조 35) 『무예신보(武藝新譜)』가 간행되었는데, 이 책은 『무예제보』와 『무예신보』를 집대성하고 보완한 것이다.
체재는 첫머리에 정조의 서(序)를 비롯하여 범례, 병기총서(兵技總敍), 척·모사실(戚茅事實), 기예질의(技藝質疑), 인용서목(引用書目) 등이 있으며, 본문에는 24종의 병기(兵技)를 수록하였고, 책 끝에는 관복도설(冠服圖說)과 고이표(考異表)가 부록으로 포함되어 있다.
서문에서는 정조가 이 책을 간행하게 된 동기를 간략히 밝히고 있다. 이에 따르면, 당시 우리 나라에는 창이나 검의 병기는 없이 궁술(弓術)만 있었다.
그런, 임진왜란 뒤 선조 때 곤봉(棍棒)·장창(長槍) 등 여섯 가지 기예를 다룬 『무예제보』가 편찬되었으며, 영조 때에는 여기에 죽장창(竹長槍)·예도(銳刀) 등 12기를 더하여 『무예신보』를 간행하였고, 다시 마상(馬上)·격구(擊球) 등 6기를 더하여 도합 24기로 된 도보를 만든 것이라고 하였다.
병기총서에서는 군문(軍門)의 건치(建置), 병서(兵書)의 편찬, 내원(內苑)에서의 시예(試藝) 등을 연대순으로 간술하고 있다. 이는 조선 초부터 『무예도보통지』 편간까지의 전투기술사 또는 병기사(兵技史)로서 큰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척·모사실에서는 이 책을 편찬하는 데 표준으로 삼은 『기효신서』와 『무비지(武備志)』의 저자인 척계광(戚繼光)과 모원의(茅元義)의 소전(小傳)을 다루었으며, 기예질의는 한교가 병기에 관하여 명나라의 허유격(許遊擊)과 문답한 것을 모은 것이다.
이 질의 끝에 있는 한교의 약전(略傳)에는 『기효신서』에 관한 구입 경로와 해석, 기예의 훈련 등에 관한 일화도 실려 있다.
인용서목에는 『기효신서』·『무비지』 등 참고한 책 145종을 기록하여, 조선의 무기(武技)와 외래의 무기가 어떻게 융합, 흡수되었는가를 한눈에 알 수 있게 하고 있다.
24기로 된 본문의 구성을 보면, 권1에는 장창·죽장창·기창(旗槍)·당파(鏜鈀)·기창(騎槍)·낭선(狼筅) 등 여섯 가지, 권2에는 쌍수도(雙手刀)·예도·교전(交戰) 등의 왜검(倭劍) 세 가지, 권3에는 제독검(提督劍)·본국검(本國劍)·쌍검·마상쌍검·월도(月刀)·마상월도·협도(挾刀) 및 요도(腰刀)와 표창(鏢槍)을 사용하는 등패(藤牌) 등 여덟 가지, 권4에는 권법(拳法)·곤봉·편곤(鞭棍)·마상편곤·격구·마상재(馬上才) 등 여섯 가지로 모두 23종으로 구분되어 있다.
그러나 등패의 사용에서 요도와 표창을 분리하여 24기로 보는 것이다. 책 끝에 있는 관복도설은 무기에 필요한 옷의 그림과 설명을 한 것이고, 고이표는 영(營)에 따라 다른 기법의 비교표이다.
이 책은 당시의 무예서들이 전략과 전술 등 이론을 위주로 한 것들인 데 비해 24기의 전투기술을 중심으로 한 실전 훈련서로, 당시의 무예와 병기에 관하여 종합적인 조감을 할 수 있는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또한, 본문 외에 당시의 역사·사회 문제를 종합적으로 조감할 수 있는 각종 자료가 모아져 있어 그 진가를 더하고 있다.
무기를 설명하는 과정에서는 각기(各技)마다 중국식·아국식(我國式)을 뚜렷이 하고, 도식(圖式)·설(說)·보(譜)·도(圖)·총보(總譜)·총도(總圖)로 나누어 일일이 알기 쉽게 그림과 함께 설명을 하고 있다.
요즈음 중국·일본 등에서도 동양무술사의 서술에 『무예도보통지』를 많이 포함하고 있다. 따로 언해본도 있는데, 이를 합쳐서 최근 한국체육사연구회에서 영인하였다. 규장각도서 등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