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독립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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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사건
천도교에서 1936년부터 일제의 패망과 조국의 광복을 기원하는 기도문을 매일 아침, 저녁 식고(食告) 때 외도록 하고 유사시에 대비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였던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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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천도교에서 1936년부터 일제의 패망과 조국의 광복을 기원하는 기도문을 매일 아침, 저녁 식고(食告) 때 외도록 하고 유사시에 대비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였던 운동.
내용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거치면서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이 심화되던 1936년에 천도교 제4대 대도주였던 박인호(朴寅浩)는 8월 14일 주요 두목들을 불러 민족정신사의 회복과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일제의 패망을 기원하는 기도운동을 전개하도록 지령을 내렸다.

이리하여 전국 각지에서 일제의 패망을 기원함과 아울러 유사시에 대비한 독립운동자금으로 특별성금 모금이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그리고 이 운동의 후반에는 일본경찰의 감시를 피하기 위하여 ‘일제 패망’이라는 문구 대신에 ‘동양평화의 기초가 하루 빨리 확립되도록 기원한다.’는 내용이 새로 삽입되었다.

그러던 중 1938년 2월 17일에 이와 같은 사실이 황해도신천경찰서에 적발되면서 전국적으로 천도교 교역자들의 검거선풍이 일어났다.

황해도 지역의 연원을 대표하던 홍순의(洪順義)와 장로 최준모(崔俊模)를 비롯하여 중앙 간부 여러 명과 전국 각지의 교역자 수백명이 피검되었고, 대도주 박인호는 노환에도 불구하고 병상에서 심문을 받기도 하였다.

구속된 교역자들은 혹독한 고문을 당했는데, 출감직후 고문의 여독으로 4명이 사망하고 많은 사람들이 고질병을 얻게 되는 등 많은 고통을 당하였다.

당시 일본 신문들은 이 사건에 대해 ‘사변하의 지하활동’, ‘극비의 불온계획’, ‘조선독립을 몽상’, ‘천도교의 대음모’, ‘특별희사금도 모집’, ‘불온문 특별기도문 일반신도에게 배부’ 등의 제목으로 보도하였다.

그런데 일제는 이 사건이 크게 번질 경우 해외에서 천도교의 기도운동을 지원하거나 국내에서 거국적인 저항운동으로 확대될 우려가 있음을 감지하였다.

이런 이유로 사건의 확대가 중일전쟁 수행에 불리하다고 판단한 일제는 일반 교역자는 모두 석방하고 최준모, 김재계(金在桂), 한순회(韓順會), 김경함(金庚咸), 홍순의 등 5인만 치안유지법으로 구속 송치하였다가 그들도 70일만에 석방하였다.

1936년부터 약 3년간 지속되었던 무인독립운동 또는 무인멸왜기도운동(戊寅滅倭祈禱運動)이라 불리는 이 운동은 일제의 탄압이 갈수록 노골화하면서 국내 민족운동이 침체하던 1930년대 후반기에 일제의 정책을 비판하고 패망을 기원하였다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고 할 것이다.

참고문헌

『천도교 운동사』(홍장화, 천도교중앙총부, 1992)
『일제의 한국민족종교 말살책』(윤이흠, 고려한림원, 1997)
집필자
조현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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