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착 없이 베푸는 보시를 의미한다. 보시는 불교의 육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로서 남에게 베풀어주는 일을 말한다. 이 무주상보시는 ≪금강경≫에 의해서 천명된 것으로서, 원래의 뜻은 법(法)에 머무르지 않는 보시로 표현되었다.
이 보시는 ‘내가’ ‘무엇을’ ‘누구에게 베풀었다.’라는 자만심 없이 온전한 자비심으로 베풀어주는 것을 뜻한다. ‘내가 남을 위하여 베풀었다.’는 생각이 있는 보시는 진정한 보시라고 볼 수 없다.
내가 베풀었다는 의식은 집착만을 남기게 되고 궁극적으로 깨달음의 상태에까지 이끌 수 있는 보시가 될 수 없는 것이므로, 허공처럼 맑은 마음으로 보시하는 무주상보시를 강조하게 된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고려 중기의 보조국사(普照國師)가 ≪금강경≫을 중요시한 뒤부터 이 무주상보시가 일반화되었다.
그리고 조선 중기의 휴정(休靜)은 나와 남이 둘이 아닌 한몸이라고 보는 데서부터 무주상보시가 이루어져야 하고, 이 보시를 위해서는 맨손으로 왔다가 맨손으로 가는 것이 우리 인생의 살림살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전제하였다.
그리고 가난한 이에게는 분수대로 나누어주고, 진리의 말로써 마음이 빈곤한 자에게 용기와 올바른 길을 제시해주며, 모든 중생들이 마음의 평안을 누릴 수 있게끔 하는 것이 참된 보시라고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