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문랑(問郎)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의 각종 재판은 의금부·형조·한성부·사헌부 및 각급 지방 관아의 상설 형정 기관에서 관장하였다.
그러나 국가 안위에 관한 반란과 왕도정치를 위협하는 모반 등 대역에 관계되는 사건은 그 중대성에 비추어 긴급히 처치하기 위해 의금부와는 별도로 개설한 국왕의 친림이나 계청(啓請)에 의해 진행되는 국청(鞫廳)·정국(庭鞫) 등 임시 기구에서 수행되었다.
형조에서 의금부로 이관된 강상사건(綱常事件)을 다루는 의정부·의금부·대간의 성국(省鞫)도 임시 기구의 일종이었다.
문사낭청은 이 가운데 국청·정국·성국·의금부가 주관한 추국(推鞫) 등의 때 차출되어 위관(委官)·의금부당상·형방승지의 지휘를 받아 도사(都事)와 함께 죄인의 국문에 참여하고 문안의 작성 등 실무를 담당하였다. 문사낭청의 설치시기와 임명자의 품계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문사낭청의 운영과 밀접히 관련된 의금부가 1414년(태종 14)에 설치되고, 문사낭청이 참여하는 국청이 1539년(중종 34) 이전에 운영되었으며, 문사낭청과 기능·품계가 비슷한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가 종5품∼종9품인 점 등에서 문사낭청은 1414∼1539년의 어느 시기에 시작되었고, 정6품∼종9품인 자가 임명되었다고 추측된다.
문사낭청의 정원은 국문의 격 및 문서의 양과 번잡 여부에 따라 국청은 8인 이상, 정국은 6인 이상, 의금부 추국은 4인 이상, 성국은 2인 이상으로 상정하였다. 그 임명은 중죄인을 다루는 중요성에서 신중하고 엄격하였다.
국청에 종사할 문사낭청은 의금부 수(首)도사가 시종(侍從)이 가진 안(案)에 위관이 보는 앞에서 명단을 기입해 임금께 아뢴 뒤 비답(批答)을 받아서 행하였다. 임명자가 칭병하고 불참하면 의금부로 하여금 그 사유를 심문하였다.
또, 유고 등으로 지방에 있으면 위관 앞에서 명단을 교체하였고, 군직(軍職)이 누락되어 있으면 초기(草記)해 추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