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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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개념
현물 없이 약속으로만 미곡을 거래하는 투기행위. 쌀 · 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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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현물 없이 약속으로만 미곡을 거래하는 투기행위. 쌀 · 콩.
내용

장래의 일정한 날짜에 현물을 주고받는 기일을 정하고, 그 기간 안에 전매하거나 되사는 방법으로 매매거래를 상계할 수 있는 정기거래를 장기청산거래라고 하는데, 본래 미곡거래에서 장기청산거래의 목적물로 된 쌀을 정기미(준말로 期米) 또는 ‘미두’라고 불렀다.

미곡거래에서 현실의 미곡거래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미곡시세의 등락을 이용해 약속으로만 매매하는 투기행위를 가리키게 되었다. 그리하여 미두에 종사하는 사람을 ‘미두장이’·‘미두꾼’이라고 부르고, 미두꾼이 모여서 미두거래를 하는 장소를 ‘미두장’이라고 불렀다.

1899년 3월 일본인이 주식회사 인천미두거래소를 설립하였는데, 이 거래소의 거래품목은 처음에 쌀·콩[豆]·석유·명태·방적사·카네킨 및 무명 등의 7개로 되어 있었고, 또 거래방법은 현물거래·선불거래·정기거래 등이었다.

그런데 실제로는 정기거래만 행하여지고, 또 얼마 안 가서 거래상품은 쌀의 일종으로 한정되게 되었다. 1910년 우리 나라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이후 일반 거래소의 설립은 일체 금지되었지만, 인천미두거래소는 예외적으로 그의 존속이 용인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 거래소의 1910∼1911년경의 1개월 거래량은 약 20만 석이었던 것이 1918년 하반기에는 1개월 평균 약 350만 석에 달하였다.

그런데 1920년 서울 진고개 일본인 미두 도박전업자 3∼4명이 체면상 정기미거래를 꺼려하는 우리 나라 재산가들을 미두도박시장으로 유인하기 위하여 쌀클럽[米俱樂部]을 설치하고 전화로 우리 나라 재산가의 미두매매에 관한 주문을 받아 인천미두거래소에 연계하여 미두매매를 하도록 유인하였다.

그리하여 미두시세의 변동에 따라 그 차액을 청산하게 하고, 처음에는 약간의 이익이 우리 나라 고객에게 돌아가게 하고, 우리 나라 사람이 미두도박의 묘미를 크게 과장하여 선전함으로써 우리 나라 사람이 미두도박시장에 뛰어들게 되었다.

이리하여 단지 전화로 미두거래를 주선하는 쌀클럽 또는 미우회(米友會) 등이 계속해서 나타나게 되었는데, 1920∼1930년의 기간에 일본인이 주재하는 미두거래소와 쌀클럽이 합작하여 개장하는 미두도박이 서울을 비롯한 도시나 지방에서 성행하게 되었는데, 서울에서만 43개 소로서, 월평균 거래량이 150만 석, 거래액이 180만 원(圓)에 달하였다.

이와 같은 미두투기는 우리 나라 재산가나 지주의 몰락과정을 촉진시키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이에 손을 댄 재산가는 파산 지경에 빠지게 되었고, 또 지주들은 그들의 토지를 수탈당하거나 또는 그들의 토지를 조선식산은행의 신탁관리에 맡기는 등 패가망신하는 자가 속출하게 되었다.

1930년 5월 부령 제136호로 시장규칙이 개정되고, 강력히 미두(기미)거래를 단속하게 되어, 쌀클럽이나 미우회는 일시에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이에 따라 미두라는 공개도박은 근절되었다. 그러니까 기미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미두라는 말은 인천의 미두거래소에서 유래된 말이라고 추측된다.

참고문헌

『군국일본조선점령36년사상』(문정창, 백문당, 1965)
『朝鮮の市場』(文定昌, 日本評論社, 1941)
『朝鮮の市場經濟』(朝鮮總督府, 1929)
집필자
이석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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