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강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한성정부 국민대회 준비위원과 조선민족대동단 단원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84년
사망 연도
1931년
본관
여흥(驪興)
출생지
충청북도 청주
주요 경력
한성정부 국민대회 준비위원|조선민족대동단 단원|상해대한교민단 학무위원
대표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1963)
관련 사건
국권피탈|3·1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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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민강은 일제강점기 한성정부 국민대회 준비위원과 조선민족대동단원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3 · 1운동이 일어나자 한성정부 수립을 위한 국민대회 준비위원으로서 활동하다가 체포되었다. 그 후 보석으로 석방된 후 조선민족대동단에 가입하여 1919년 10월 31일 만세 시위를 계획하다가 발각되어 다시 옥고를 치른 뒤 상하이로 건너가 활동하였다.

정의
일제강점기 한성정부 국민대회 준비위원과 조선민족대동단 단원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
인적사항

민강(閔橿, 1884~1931)은 충청북도 청주 출신으로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주요 활동

1909년 비밀결사인 대동청년당을 조직하였으며, 1910년 국권피탈(國權被奪)을 당하게 되자 남대문 밖에 소의학교를 설립하였다. 1919년 3 · 1운동이 일어나자 한성정부 수립을 위한 국민대회의 준비위원으로서 활동하였다. 자신이 경영하는 동화약방을 거점으로 준비 자금을 모으고 연락을 취하였다. 이 일로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8월에 보석(保釋)으로 출옥하였다.

출옥 이후 조선민족대동단에 가입하여 동화약방을 연락 거점으로 제공하였다. 조선민족대동단이 1919년 10월 31일을 기해 준비한 만세 시위에서 서울의 연통단, 중앙단, 중앙청년단, 독립청년단, 불교중학학림 등 학생과 청년단체의 동원 책임을 맡았다.

만세 시위가 준비 부족으로 연기되고 경찰에 발각되면서 체포되었다. 1921년 3월 2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상하이〔上海〕로 건너가서 1924년 상해대한교민단의 학무위원으로 활동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기도 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追敍)되었다.

참고문헌

논문

장석흥, 「조선민족대동단 연구」(『한국독립운동사연구』 3,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9)

판결문

「판결문」(경성복심법원, 1921. 3. 23)
「판결문」(경성지방법원, 1921. 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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